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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교회

프란시스코 교황 한국 방문 3

불꽃緝熙 2014. 8. 23.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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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탈리아 반도 로마시 서쪽 테베레강 건너에 자리 잡은 바티칸시국! ...
 

 

    ♣ 로마 교황청 바티칸시국 ♣ 오늘 프란치스코 교황이 우리나라에 왔습니다.(2014.8.14-18, 4박5일 일정) 프란치스코(라틴어: Franciscus)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제266대 교황이며, 본명은 호르헤 마리오 베르고글리오(스페인어: Jorge Mario Bergoglio)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태생으로 화공학자와 나이트클럽 경비원으로 잠시 일하다가 신학교에 입학하여 신학생이 되었습니다. 1969년에 사제 서품을 받았으며 1973년부터 1979년까지 예수회의 아르헨티나 관구장을 지냈으며 1998년에는 부에노스아이레스 대교구장으로 임명되었고 2001년에 추기경으로 서임되었습니다. 2013년 2월 28일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스스로 교황직을 사임한후에 소집된 콘클라베에서 다수의 표를 얻어 같은해 3월 13일 교황으로 선출되었습니다. 교황에 선출된 그는 자신의 새 이름을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이름을 따서 프란치스코라고 명명하였습니다. 프란치스코는 교회 역사상 최초의 아메리카 대륙 출신 교황이면서 최초의 예수회 출신 교황입니다. 이탈리아 반도 로마시 서쪽 테베레강 건너에 자리 잡은 바티칸시국! 영토로 보자면 서울의 창경궁 크기(0.44㎢)의 초미니 국가이지만 12억 가톨릭신자들을 실제로 통솔하면서 전세계 대부분의 국가(173개국)와 외교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이 작은나라의 수장인 교황의 도덕적 권위가 세계 최강임을 우리는 2005년 4월 요한바오로 2세의 장례식에서 목격하였습니다. 교황의 이 영향력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요? 그것은 정치 군사적 위력이 아닌 정신적 도덕적 권위에서 나온 것입니다.

     

    ▲ 로마교황청. 전세계 가톨릭교회의 상징인 바티칸 성베드로 성당 ...

     

    우리나라는 1963년부터 교황청과 외교관계를 맺고 상주 대사를 교환하고 있으며,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1983년과 1989년에 우리나라를 방문하였고 김대중 대통령이 2000년 교황청을 방문하였습니다. '바티칸 시국’(Vatican City)은 흔히 ‘교황청’(Curia Romana)이라고도 하며, 가톨릭 신도들에게서는 ‘성좌’(聖座 The Holy See)라고도 불리고 있는데, 같은 말처럼 쓰이나 정확한 의미는 다르다고 합니다. ‘바티칸 시국’은 0.44㎢의 영토를 의미하며 교황청이 국가로서 존립하는 기반이 됩니다. ‘교황청’은 교황이 가톨릭교회의 수장으로서 이끌어가는 행정기구이며 ‘성좌’는 전 세계 모든 나라에 퍼져 있는 가톨릭교회를 대표하는 종교적 권위를 일컫는 말이라 합니다. 한 왕조 혹은 국호가 2000년을 이어온 역사적 전례가 없는데 교황이 예수 그리스도의 열두 제자 가운데 우두머리였던 베드로 사도의 266대 후계자라는 위치가 놀랍고 인종과 국경을 초월하여 전세계에 산재한 12억 가톨릭 신자들이 한 마음으로 복종하는 지도자라는 점에서도 교황청은 흥미로운 곳이며 르네상스 예술의 건축과 미술이 한데 모여 있는 박물관이기도 합니다.

     

     

    교황청 안에는 여러 개의 성(省)이 있는데 각 성에는 장관 추기경이 있고 국무원(國務聖)과 동방교회성이 막강한 권한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신앙교리성성은 가톨릭교회의 신앙과 윤리에 관한 교리를 수호하는 책임을 맡고 있으며 로마의 종교재판소(Roman Inquisition)를 관할하고 있습니다. 그밖의 성성으로는 동방교회성성, 주교성성, 성사경신성성(聖事敬神聖省), 시성시복성성(諡聖諡福聖省),성직자성성, 수도자 및 재속(在俗)수도회성성, 가톨릭 교육성성, 인류복음화성성 등이 있습니다. 교황청의 사법 분과는 대심원(Apostolic Signatura:최고 재판소), 교황청 항소원(Sacred Roman Rota), 그리고 교황청 내사원 (Sacred Apostolic Penitentiary)의 3개 재판소로 나뉘어 있습니다. 이외에도 여러개의 사무처와 3개 사무국이 있는데 사무국에는 그리스도교 일체사무국, 비그리스도교 사무국, 무종교인 사무국이 있으며, 평신도협의회·정의평화위원회가 있습니다. 학문연구에 관한 교황의 관심을 반영하는 몇 개의 상설위원회가 있고, 여기에는 교황청 성서연구위원회와 교회법전개정을 위한 교회법 개정위원회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로마 교황청 광장 ...

     

    우리나라에 교황(敎皇)이라는 이름이 처음으로 소개된 것은 1610년 경이며, 교황청에 조선(朝鮮)이라는 나라가 알려진 것은 1660년이었다 합니다. 조선 중기의 유학자 이수광은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天主實義)를 소개하면서 교황에 대해 “그 풍속에 군(君)을 교화황(敎化皇)이라 하고 결혼하지 않으며 자식이 승계하는 일이없고 현자를 뽑아 옹립한다”고 적었습니다. 한편 로마 교황청은 1660년에 중국에 남경(南京) 대목구(代牧區)를 설정하면서 그 안에 조선까지 포함시킴으로서 처음으로 조선지역 포교에 대한 관심을 나타내었습니다. 북경에 파견된 선교사들은 포교를 위해 한문으로 천주교 서적들을 저술하였는데 이를 구입하여 연구하던 남인파 학자들이 그 가르침에 흥미를 가졌고 그들의 대표로 북경에간 이승훈(李承薰)이 1784년 북경의 북당(北堂)에서 최초로 세례를 받고 돌아와 동료 선비들에게 세례를 베풀어 조선 천주교가 창설 되었습니다. 1785년초에 북경교구에 부임한 구베아 주교는 조선에 복음이 기묘하게 전래하고 발전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1790년 교황청 포교성 장관에게 서한을 보내고 포교성은 조선교회을 돌보는 임무를 구베아 북경 주교에게 위임하였으며 구베아 주교는 조선교회에 선교사 1명을 파견하였는데 1801년 박해로 그 선교사와 유능한 교회지도자들을 잃게 되었습니다. 1831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16세는 조선을 북경교구에서 독립된 대목구(代牧區)로 설립하고 조선교회의 사목을 파리외방전교회에 위임하였으며, 이때 조선 대목구 설정으로 조선교회는 로마 가톨릭 교회와 직접 교류할수 있게 되었습니다. http://catholicphilly.com/media-files/2012/12/curia.jpg?

     

    ▲ 교황청 추기경 회의 ...

     

    교황청이 조선을 독립교구로 선정하여 앙베르, 모방, 샤스탕 신부를 조선에 파견해 천주교를 전파해 나갔으나, 조선 조정은 서구 열강들의 제국주의와 기독교가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우려하여 천주교를 금지하였으며 1839년에는 천주교 박해사건 중의 하나인 기해박해를 일으켜 3명의 프랑스 천주교 신부를 처형하였습니다. 이때 조선 조정의 박해로 1839년과 1846년 3명의 선교사와 최초의 우리나라 신부 김대건을 위시하여 수많은 교우들이 순교하게 되었습니다. 제3대 대목(代牧) 페레올 주교는 조선 순교자들의 전기를 작성하여 1847년 로마로 보냈으며, 그래서 조선 순교자들의 시복(諡福) 수속이 정식으로 접수되었고 1857년에 조선 순교자 82명이 가경자(可敬者)로 선포되었던 것입니다.

     

    ▲ 의장대를 사열하는 박근혜 대통령과 프란치스코 교황 ...

     

    1866년(고종3) 정월 대원군의 천주교 탄압 교령(敎令)이 포고되자 프랑스 선교사 12명 중에서 9명이 처형된것을 필두로 불과 수개월 동안에 국내 천주교 신도 8천여명이 처형되었습니다. 산속으로 피신하여 쫓겨 다니다가 병으로 죽고 굶주림에 쓰러지는 부녀자와 어린이가 부지기수였으며 이 통에 신도도 아닌 자들이 박해당한 예도 허다하였습니다. 프랑스 선교사 12명 중 9명이 처형되고 살아남은 리델은 청나라로 탈출해 천진 주재 프랑스 함대사령관 피에르 구스타브 로즈에게 박해 소식을 전했고 이는 그해 11월 발생한 병인양요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이로서 병인박해는 천주교 선교사와 동포를 대상으로 한 결코 정당화될수 없는 치욕적인 학살이었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79명이 1925년 교황 피우스 11세에 의해 성베드로 대성당에서 복자(福者)로 선포되었고 1968년 다른 한국 순교자에 대한 시복(諡福)이 다시 거행되었으며 1983년 서울을 방문한 교황 요한바오로 2세는 103위의 순교자들을 성인(聖人)으로 시성(諡聖)하였습니다.

     

    ▲ 세월호 유가족과 인사하는 프란치스코 교황 ...

     

    그뒤 교황 요한 23세가 1962년 한국에 정식 교구(敎區)를 설정하여 서울, 대구, 광주 교구 등이 생겼으며 1962년 말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한국 주교단이 정식으로 참석하였습니다. 1969년 한국교회에 처음으로 김수환 추기경이 탄생하였고 2006년 정진석 추기경이 두 번째로 서임되었습니다. 광복후 대한민국정부를 제일 먼저 승인한 곳은 교황청이었습니다. 1947년 교황청은 한국에 교황사절(敎皇使節)을 파견하였고 1949년에는 서울에 상주 교황사절관이 설치되었으며 메리놀 선교사 교황사절 번주교는 6.25 전쟁 중 공산군에게 납치되어 사망하기도 하였습니다.

     

    ▲ 학생 대표와 인사하는 프란치스코 교황 ...

     

    대한민국은 1963년 바티칸 시국과 공사급 외교사절을 교환하기로 합의함으로써 정식 외교관계가 수립되었으며 당시 교황사절 안토니오 델 주디체 대주교가 초대 교황 공사로 승진되었고 우리 정부는 주스위스 이한빈 대사를 초대 주교황청 공사에 겸임시켰습니다. 3년후 양국은 공사급 외교사절을 대사급으로 승격시켰으며 델 주디체 교황공사가 교황대사로 승진하고 정부에서는 정일영 주스위스 대사를 주교황청 대사에 겸임시켰습니다. 교황 요한바오로 2세(재위: 1978-2005)는 1984년 5월 한국 천주교 200주년을 기념해 사상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한 교황이 되었습니다. 요한바오로 2세는 여의도 광장에서 한국 순교자들의 시성식(諡聖式)을 주례 103위 한국 순교 성인을 탄생시킴으로써 한꺼번에 1백명이 넘는 성인을 교황청 밖에서 시성하는 첫 기록을 남겼습니다. 그로부터 6년만인 1989년 제44차 서울 세계성체대회를 맞아 방한한 교황은 여의도에서 세계성체대회를 주재, 한국과 우리 겨레에 대한 각별한 사랑을 표현했으며 교황의 요한바오로 2세의 두 번의 방한은 우리나라의 민주화를 갈구하던 젊은이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으며 한국교회가 급성장하는데 일조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이번 프란치스코 교황은1989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두 번째 방한(訪韓)이후 25년 만에 한국을 다시 찾는 교황이 되는데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한 교황의 모습을 행동으로 보여준 프란치스코 교황입니다. 특히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한반도 분단 상황에 대해 언급하며 '평화'와 '화해'를 기도해왔다는 점에서 이번 방한에서 그가 어떤 메시지를 전할지가 세계적인 관심사가 되고 있습니다.

     

    ▲ 환영객에 인사하는 프란치스코 교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