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6월 14일 연중 제10주간 토요일
너희는 말할 때에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 (마태오 5,33-37)
Let your ‘Yes’ mean ‘Yes,’
and your ‘No’ mean ‘No.’ Anything more is from the Evil one.”
말씀의 초대
엘리야는 주님께서 이르신 대로 엘리사를 만나 자신의 뒤를 이을 예언자로 세운다.
엘리사는 겨릿소로 밭을 갈고 있었는데 엘리야를 만나자 자신의 부모에게 작별 인사를 한 뒤
소를 잡아 사람들이 먹도록 내어놓고 엘리야를 따라나선다(제1독서).
‘정직함’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이다.
예수님께서는 거짓 맹세는 물론 아예 맹세를 하지 말 것이며, ‘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오.’라고만 하라고 이르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 말씀을 우리는 ‘정직성’ 또는 ‘진실성’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으로 새길 수 있습니다.
사실 ‘정직’과 ‘진실’의 의무 또는 덕목은 모든 종교와 윤리의 기본적인 가르침이며,
사회의 법을 지탱하는 가장 중요한 힘이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 말씀이 우리에게 무척 무겁게 다가오는 것은 우리 시대가 진실과 정직보다는
허위와 왜곡을 일삼는 문화 속에서 병들어 가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한 사람의 정직함과 진실함의 가치는
그의 성향이나 외적 태도를 가리키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진리’와 어떻게 관련하는지에 따라 최종적으로 결정됩니다.
그가 과연 ‘진리를 담을 만한 그릇’이 되는지에 따라 깊은 인격적인 차원의 정직성과 진실성을
가늠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리스 철학에서 ‘진실성’의 덕목을 가리키면서 ‘진리’와 같은 말을 사용한 데에는
이러한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진리를 담을 그릇이 되는 것이 인간의 힘만으로,
사람의 덕성과 경험만으로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진실은 진리와 닿아 있고, 인간적 진리라는 것은,
사실은, 가장 깊은 차원에서 하느님께 속할 때만이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헛되고 과장된 맹세가 아니라
진실하고 겸허한 모습을 강조하신 것은 그러한 뜻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삶 안에서 자신의 ‘진실성’이 시험받는 순간마다 겸허하게 주님의 도움을 청하며
‘나의 진리’가 아니라 주님의 말씀에 더욱 귀 기울이도록 힘써야 하겠습니다.
☆☆☆
말이 난무하는 세상은 불안한 세상입니다.
앞날이 불확실해지면 헛소문이 많습니다. 사람들이 없는 말을 만들어 내기 때문입니다.
온갖 유언비어가 떠돌고 사회는 방향 감각을 잃어 갑니다.
독재자가 등장했을 때 우리는 이것을 체험하였습니다.
그러니 정확하게 말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정확하게 살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정확한 삶이란 ‘자신의 말에 책임지는 것’을 뜻합니다.
주님께서도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여라.”는 명언을 남기셨습니다.
그러므로 단순하게 살아야 합니다.
단순한 삶이 되어야 주님의 가르침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주님 역시 단순한 분이십니다.
사람 사는 것이 복잡하기에 주님을 어렵게 생각할 수 있으나
그분의 가르침은 늘 쉽고도 간단하였습니다.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큰 감정으로 싸우지 않습니다.
작은 감정으로 싸웁니다. 하찮은 감정이 싸움을 유발시키는 것이지요.
내 기분에 휩싸여 무심코 던지는 말이 상대방을 아프게 합니다.
사랑의 표현에 무슨 맹세가 필요할는지요?
따뜻한 미소, 다정한 눈길 하나가 무엇보다도 확실한 맹세의 표현이 아닐는지요?
☆☆☆
우리가 살아가면서 분명하게 답변해야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애매한 답변을 자주 하게 됩니다.
체면 때문에, 마음이 약해서 이미 거짓말을 했기 때문입니다.
‘예.’, ‘아니요.’가 매우 간단해 보이지만 결코 간단하지 않습니다.
때때로 대단한 정직과 용기가 필요합니다.
엘리사는 엘리야의 부름을 받고 주저 없이 ‘예.’ 하고 따랐습니다.
그 대답을 위해서 그는 그의 가족과 밭일 모두를 아낌없이 버려야 하는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우리에게도 ‘예.’와 ‘아니요.’를 분명히 말할 수 있는 용기와 정직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는 우리가 하느님께 청할 수 있는 덕목임에 틀림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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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에 어떤 마사지사로부터 얼굴을 작게 하는 마사지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얼굴이 생긴 대로 모습을 갖는 것이지 마사지를 통해서 얼굴이 어떻게 작아지냐고 했더니만, 얼굴에도 근육이 있는데 이 근육들이 뭉치면 얼굴이 크게 보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뭉친 얼굴 근육을 풀어주면 얼굴이 작아진다고 하더군요. 그러면서 재미난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어떤 분도 저처럼 이 말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고 하더래요.
그러면서 얼굴의 반쪽만 그 마사지를 해달라고 하더랍니다. 이 분은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고,
혹시 정말로 작아졌는지를 알려면 비교해보기 위해서라도 한쪽만 마사지를 해봐야 한다는 것이었죠.
이 분의 요청대로 얼굴의 반쪽만 마사지를 했답니다.
그리고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옛날 ‘마징가 Z’이라는 만화영화에서 ‘아수라 백작’이 나오는 데요.
바로 그 모습이 되었다고 합니다. 즉, 얼굴을 딱 반으로 나누어서 서로 다른 얼굴을 하고 있는
‘아수라 백작’처럼 얼굴의 중앙을 기준점으로 확연히 다른 모습이 되었다고 해요.
한쪽은 작아진 얼굴로, 또 한쪽은 여전히 큰 얼굴로…….
결국 이 사람은 나머지 반쪽도 마사지를 받았다고 하네요.
처음에 믿지 않은 것에 대해서 후회하면서 말이지요.
이분이 마사지사의 말에 믿음을 가졌더라면 어떠했을까요?
이렇게 한쪽만 마사지 하라고 하지 않았겠지요. 그럴 리가 없다는 생각 때문에
또한 자신의 판단이 옳다는 생각 때문에, 이 사람은 난처한 상황에 놓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사실 다른 이들의 말에 대한 믿음을 갖는다는 것,
특히 요즘처럼 불신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쉽지 않은 모습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우리를 창조하신 하느님 아버지께 대한 불신도 가득해지고 있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을 우리가 어떻게 다 알 수가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하느님보다도 위에 있는 듯이 모든 것을 다 아는 듯 말과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아예 맹세하지 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늘을 두고도, 땅을 두고도, 예루살렘을 두고도, 자신의 머리를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고 하시지요.
바로 겸손하지 않기 때문에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앞서도 말씀드렸듯이 우리들은 너무나 쉽게 맹세하면서 자신의 말이 옳다는 것을 드러내려고 하지요.
자기만 옳다는 교만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저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 라고 함으로써 섣부른 판단은 금물임을 분명히 하십니다.
교만에서 나오는 섣부른 판단이 곧 악에서 나오는 것이랍니다.
우리들의 목표는 악이 아닌 선으로 기울어지는 것이라고 말할 때,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당연히 겸손하게 살아야 하겠지요?
내 의견을 끝까지 주장하지 말고, 겸손해지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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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과의 약속
- 김선오 신부-
오늘 독서에 나오는 엘리사가 스승으로부터 부르심을 받고 나서 했던 행동이 참으로 인상적입니다.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작별인사를 한 뒤에 선생님을 따라가게 해주십시오”(1열왕 19,20)라고 말하고 나서 그는 자신의 겨릿소들을 잡아서 먼저 하느님께 ‘서원’을 합니다. 그러고는 ‘쟁기’를 부수어 장작으로 쓰고 겨릿소들을 모두 고기로 구워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면서 본인의 의지를 새롭게 합니다. 엘리사는 ‘하느님께 서원’을 하고 나서 실제로 그 서원을 행동으로 드러냅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쟁기도, 겨릿소도 아무것도 필요치 않다는 대단한 믿음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맹세하지 마라’라는 말씀을 네 번이나 반복하십니다. 그것은 혹시 ‘말로만’ 떠들고 행동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 아닐까요? 말잔치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조용하지만 단호한 행동을 보여주는 것이 하느님께서 더 바라시는 것이 아닐까요? 엘리사의 삶의 결단은 우리에게 큰 가르침을 줍니다.
저는 하느님께 온 존재를 봉헌하겠노라고 수도자로서 서원을 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 약속이 ‘말잔치’로 끝나지 않도록 오늘 하루를 돌아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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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혹된 말
- 박혜원(경남 거창고등학교)-
매일성경묵상’ 원고 청탁을 받았을 때 나는 당연히 사양했다. 나의 삶이 나의 글과 일치하지 않는데,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또다시 부탁을 받았을 때 나는 갈등하기 시작했다.
미미하지만 나의 글이 하느님 사업에 도움이 된다면 피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지 않을까? 그리고 마침내 이렇게 글을 쓰고 있다. 나는 왜 글을 쓰고 있는 것일까? 이 일을 통해 나 스스로를 고발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래서 주님 앞에 발가벗고 서서, 내 삶의 무게를 좀 더 가볍게 하고 싶었던 것일까?
생각해 보면 나의 삶은 말과 글로 점철되어 왔다. 학교에서 강의를 하고 소설을 쓰고 수필을 쓰고…. 말과 글을 다루는 직업. 그러나 이런 ‘글 쓰는 행위’에 대해 늘 회의하곤 한다. 나는 ‘모호한 표현’, ‘잘못 해석될 말’들을 통해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을 기만하고 있는 건 아닌지….
그저 주님 앞에서 일대일의 관계로 단순하게 살면 될 일을 속된 ‘말의 잔치’ 속에 사람들을 끌어들여 미혹시키고 있지는 않은지…. 빈말을 하지 않아도 들에 핀 꽃들은 가장 아름다운 기도를 드리고, 잘 익은 사과는 그 향기로도 충분히 하느님을 찬양하고 있는데 말이다.
관상기도에 대해 공부한 적이 있다. 깊은 침묵 속에서 그냥 ‘아버지’만 불러도 그분의 존재감이 충만했다. 하느님의 현존 안에 온전히 몰입될 수 있었다. 하느님의 신성이 천박하고 하찮은 말로 속되고 야한 것들과 섞이지 않았다. 그래서 더 순수할 수 있었다.
결혼할 때 혼인서약을 하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불륜을 저지르고 이혼을 하는지…. 인간의 약속은 믿을 것이 못된다. 나 자신은 더더구나 믿을 수 없다. 그야말로 완전하신 하느님 외에는 그 무엇도 온전하지 않고 믿을 수도 없다. 하느님 외에는 그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고 헛될 뿐이다. 아, 하느님 외에는 그 무엇도 꿈꾸지 않고 말하지 않는, 온전한 그분의 사람이 될 수는 없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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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일 신부-
형제자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하루하루 각자의 삶에 있어 충실히 살아가시느라 수고가 많으시지요? 사람은 저마다의 삶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스스로에게 다짐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의 각오를 맹세하기도 합니다. 스스로에게 다짐하고 이웃에 맹세하는 행위들은 어떻게든 목표를 이루려는 인간의 원의라고 보아집니다. 그러나 실상 이 원의들이 제대로 되지 않기가 쉽습니다. 자신의 의지가 자신의 원의를 채울 만큼 강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맹세를 한다고 할 때에 맹세는 우리의 힘으로 지킬 수 있을 때도 있지만 그렇지 못할 때가 더 많다고 생각됩니다. 맹세는 자신이 진실로 여기는 것을 말하고 확실성을 가지고 맹세해야 하며 맹세로 약속한 것은 반드시 이행하겠다는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맹세와 관련해서 아예 맹세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하느님께 나아가는 데에 있어서 우리 자신이 자신의 힘을 믿지 말라는 말씀으로 여겨집니다. 그것은 자칫 하느님의 이끄심을 간과하고 자신의 힘을 믿는 쪽으로 빠지기 쉽기 때문입니다. 또한 인간의 의지가 자신이 맹세한 바를 실천할 수 있을 만큼 늘 충만하지도 못합니다. 더구나 우리가 알고 있는 진실이 참으로 하느님께서 지니고 계시는 진실과 같다는 보장도 할 수 없습니다. 말하자면 우리의 인식도 의지와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빛을 향하지 못하면 자신만의 인식으로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 인식은 사람과 세상을 존재하게 하신 하느님을 향하지 못하고 자기 자신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게 합니다. 즉,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인간의 참모습을 보지 못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자신에 대해 말한다고 할 때에도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실제 자신의 모습을 잘 알고 말한다기보다는, 왜곡된 자기에 대한 인식을 자신의 본모습으로 착각하고 말하기 쉽습니다. 결국 자신에 대한 진실을 말하려고 할 때조차도 참자신이 아닌 곧, 부족한 인식이 이해한 자신을 드러내고야 마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실을 말하기 위해서는 이런 인식의 재조명이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그것은 하느님에 대한 믿음의 인식으로 변화되어야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하늘을 두고도, 땅을 두고도, 자신을 두고도 아예 맹세하지마라”고 하신 것 같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부족함을 잘 알고 계시고 채워주시기를 바라십니다. 우리 자신이 부족한데도 스스로의 의지를 믿고 잘못된 길을 가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맹세를 통하여 자신의 의지가 드러나기보다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 라고 하기를 바라십니다. 하느님께 나아가는 우리의 구원여정에 있어 나를 믿기보다 더 하느님을 신뢰하라는 말씀이라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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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오상선신부-
우리는 수많은 말을 하고 살아가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말은 <예>와 <아니오>이다. 우리 인생은 끊임없는 질문의 연속이다. 그 질문에 <예스>할 수도 있고 <노우>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답변에 따라 결과는 엄청나게 달라진다.
중요한 것은 <예> 해야 할 때 <예> 해야 하고 <아니오> 해야 할 때 <아니오>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성모님께서 가브리엘 천사의 방문을 받고 하느님의 뜻에 <아니오> 하였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우리 구원의 역사는 시작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성모님의 그 <예> 한마디가 우리 구원의 시작이 되었다.
만일, 아담과 하와가 유혹자 뱀의 제의에 <아니오> 하였더라면 어찌되었을까? 인류는 원죄의 업보 때문에 괴로워하지 않고 하느님나라의 영광을 언제나 누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담고 하와의 그 잘못한 <예> 한마디가 인류를 죄의 늪에 빠지게 만든 결정적인 사건이 되었다.
소고기 문제의 파장이 이렇게 커지게 된 것은 <예> 할 것을 대통령과 정부가 하지 않아서 일 것이고, 미국과의 협상에서 <아니오> 해야 할 것을 <예> 하였기 때문이다.
오늘도 우리에게는 <예> 해야 하는 상황과 <아니오> 해야 하는 상황이 닥치게 될 것이다. 주님께서는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라고 하라고 명하신다.
어떤 것이라도 선을 지향하는 것이라면 내가 좀 힘들고 작은 희생이 따른다 하더라도 <예>하자. 반대로 어떤 것이라도 악으로 향할 수 있는 것이라면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이익이 있다하더라도 <아니오> 하자.
그것이 우리가 하느님의 도구가 되느냐 악의 도구가 되느냐를 결정하게 된다. 이 얼마나 두렵고도 떨리는 일인가! <예> 한마디, <아니오> 한마디가...
일부 개신교 신자들은 <아멘>에 너무 익숙해져 있더라. 목사님들 말 한마디 한마디에 <아멘><아멘>을 남발하더라. <아멘>해야 할 때 하고, <피앗>이라고 해야 할 때 <피앗>을 외칠 수 있는 신앙인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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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 세상 것을 포기하고 하느님을 따르는 엘리사 - 경규봉 신부-
엘리사는 황소 열두 쌍에 겨리를 지워 밭을 갈 정도로 부유한 집안 출신이었다. 그는 부족함 없이 넉넉하게 살았다. 그에게는 집 안에서 해야 할 일도 많았고, 그의 부모가 그에게 거는 기대 또한 컸다. 그러나 엘리야가 그를 부르자 그는 주저 없이 모든 것을 버리고 엘리야를 따른다.
그는 부모와 작별 인사를 나눌 허락을 받고 황소를 잡아 그동안 자신을 돌보아준 이들에게 감사의 뜻을 표하고, 쟁기를 불살라 버림으로써 이제까지 살아온 삶을 정리한다. 그는 자신의 지난 모든 삶을 깨끗이 청산하고 정리한 후 미련이나 망설임 없이 엘리야를 따른다. 겉옷을 던지는 것은 엘리야가 엘리사를 자기 제자로 삼아 자기를 섬기게 한다는 표시인 동시에 엘리사가 앞으로 예언자로서 받게 될 전권을 미리 암시한다.
자기가 살던 곳을 떠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살기 어려워서 떠나는 것이 아니라 풍족하고 아쉬움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떠난다는 것은 더더욱 쉬운 일이 아니다. 더욱이 나그네 생활의 고달픔을 아는 사람으로서 미래에 닥칠 위험을 감수하면서 안락하고 넉넉한 집을 떠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렇지만 엘리사는 엘리야의 부름을 받자 자신에게 보장된 모든 것을 과감히 포기하고 엘리야를 따라 나섰다. 부모도, 재산도, 친구도 포기했다. 가정이 주는 편안함과 안락함도, 사람들과의 우정이나 사랑도, 자신이 누릴 수 있는 권리나 권한도 포기했다. 그는 오직 예언자 엘리야를 통하여 부르시는 하느님의 말씀에 충실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했다.
신앙이란 자신의 삶을 포기함으로써 출발한다. 지금까지 자신이 믿고 의지했던 모든 것을 포기함으로써 시작한다. 오직 하느님께 의지하고 그분의 말씀에만 의지함으로써 시작한다.
창세기 12장에 나오는 아브라함이 그가 살던 도시 하란을 떠날 때 75세의 늙은 나이였다. 그는 도시에서 편히 살고 있었고, 이제 여생을 마무리하려고 준비하는 상태에 있었다. 그는 어느 정도 재산을 모았고, 물질적으로 아쉬움이 없는 상태였다. 다만 재산을 물려줄 자식이 없었을 따름이었다.
늙은 몸을 이끌고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땅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른 체 편안하게 살던 곳을 떠난다는 것은 대단히 힘든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오직 하느님과 그분의 말씀에 의지하여 길을 떠났다. 왜냐하면 신앙이란 자신의 삶을 떠나고 자신이 믿고 의지하는 모든 것을 떠남으로써 시작하기 때문이다. 인생이란 하느님을 향한 긴 순례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느님만 의지하여 길을 떠난 그에게 평화와 안정, 번영만이 약속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많은 고통과 시련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흉년이 들어 그는 이집트로 피난해야 했으며, 아내를 아내라고 말하지 못하면서까지 목숨을 부지해야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사랑하는 조카 롯과 헤어져야 했으며, 늙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여러 전쟁을 치르기도 해야 했다. 인간적으로는 자기가 살던 도시 하란이 살기에 편안하고 안락했다. 그렇지만 인간적인 고통과 시련을 통해서 그는 하느님을 더 깊이 체험했고,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 더 굳세어져갔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인간적인 편안함과 행복만을 누리도록 하시지 않으신다. 오히려 시련과 고통을 허락하신다. 그리하여 우리가 시련과 고통 속에서 하느님을 더 깊이 체험하고 느낌으로써 우리의 신앙이 깊어지기를 원하신다. 우리가 이 세상의 것에 만족하여 세상에 빠지고 주저앉기보다 세상의 덧없음을 깨닫기를 원하신다. 그리하여 오직 하느님만이 영원한 행복과 기쁨을 주시며, 하느님 안에서만 기쁨과 평화를 찾기를 원하신다. 우리의 신앙이 더 깊고 굳세어지도록, 그래서 오직 주님을 찾기를 원하신다.
아브라함은 시련과 고통을 통해서 하느님만이 주님이시며, 그분만이 참 행복을 주시는 분이심을 체험했고, 모든 믿는 이들의 조상이 되었다. 하느님께서는 이처럼 아브라함을 끌어주시고 그의 믿음을 키워주셨을 뿐만 아니라 그의 이름이 자손만대에 이르기까지 알려지도록 하셨다.
오늘 우리가 기대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세상이 주는 기쁨과 평화인가? 세상의 편안함과 안락함인가? 그렇다면 우리는 아직 신앙의 길을 걷고 있다고 말하기 어렵다. 신앙인의 조상 아브라함처럼, 하느님의 사람 엘리사처럼 자신의 삶을 포기하고, 세상 것에 대한 기대를 버리고 오직 하느님을 믿고 그분의 말씀에 의지하며 살아갈 때, 우리는 비로소 참 신앙의 길을 걷게 된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하느님을 깊이 체험하고, 하느님께서 주시는 참 행복과 평화를 누리게 된다. 인생은 순례이며, 우리는 언젠가 이 세상을 떠나야 하는 순례자이다. 그러므로 세상에 안주하기보다 하느님을 향해 길을 떠나는 신앙인, 하느님을 향해 나가는 순례자의 삶을 살자...............◆
새벽을 열며
자신이 하는 일에 늘 불평불만이 가득한 석공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부유한 상인의 집 앞을 지나다가 우연히 그 집안을 들여다보게 되었어요. 한눈에도 대단히 화려했습니다. ‘나도 저렇게 살아 봤으면!’ 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 무슨 조화인지 석공은 갑자기 그 부유한 상인이 된 것입니다. 소원대로 실컷 돈을 쓰며 살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얼마 안 돼 높은 자리에 있는 장군이 병사의 호위를 받으며 길을 지나는 장면을 보았습니다. 아무리 부자라도 장군 앞에서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다시 ‘나도 저렇게 살아 봤으면!’ 싶었습니다.
이번에도 순식간에 그는 장군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날마다 호위병들에 둘러싸여 있다 보니 답답한 것이에요. 그래서 세상을 자유롭게 다니는 바람을 동경하기 시작했습니다. 곧 바람이 된 그는 이번에는 아무리 힘을 써도 끄떡없는 커다란 산에 있는 바위에 감탄을 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다시 바위가 되었어요.
‘바위보다 더 강한 게 뭐지?’ 이렇게 생각하며 산 아래를 쳐다보는데, 한 석공이 바위를 열심히 쪼고 있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다시 석공을 돌아오게 되었고, 그는 이렇게 다시 석공이 된 것에 너무나도 감사하면서 살게 되었다고 하네요.
결국 자신의 자리가 가장 좋은 자리, 가장 행복한 자리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남의 자리가 가장 좋은 자리, 행복한 자리라고 생각하고 또한 그러한 착각 속에서 힘들게 살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주님께 기도합니다.
“주님, 제가 이렇게 살겠습니다. 따라서 저의 이 부탁을 꼭 들어주셔야 합니다.”
사실 주님께서는 우리들을 너무나도 사랑하시지요. 그래서 우리가 그렇게 땡깡부리듯이 주님께 청하더라도, 그 부탁이 나에게 이롭지 않을 경우에는 그 부탁을 들어주시지 않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어때요? 그 결과가 나에게 나쁠 지라도, 지금 이 순간에 내가 바라는 것이 곧바로 다가오기를 주님께 협박을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이렇게 철부지 같은 우리들의 모습을 너무나 잘 아시는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말할 때에 ‘예.' 할 것은 ‘예.'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 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
지금 나의 자리에서 한 번 생각해보세요. 그 자리를 얼마나 감사하면서 살고 있었는지요? 혹시 주님의 뜻은 전혀 생각하지 않으면서, ‘예.’ 할 것은 ‘아니요.’라고, 또한 ‘아니요.’라고 할 것을 ‘예.’라고 말하는 잘못된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우리들을 너무나도 사랑하시는 주님이라는 굳은 믿음만 있다면 굳이 맹세 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바로 이렇게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길 수 있는 그런 믿음을 간직하길 이 새벽에 기도합니다.
지금 내가 행복한 이유를 찾아봅시다. 한 50가지만 찾아볼까요? 너무 적나요?
빠다킹신부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라고만 하여라.
-김지영 신부-
◆어디선가 읽은 글이다. ‘나는 늘 호주머니에 십자가를 넣고 다닙니다. 어디에 있던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상기시켜 주니까요. 이 작은 십자가는 마술도 아니고, 기막힌 행운을 가져다 주지도 않습니다. 그것은 모든 해악에서 저를 보호해 주지도 않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나와 구세주의 관계를 이해시키는 것뿐입니다. 호주머니에서 동전이나 열쇠를 꺼낼 때 내 손에 잡히는 이 십자가는 주님께서 나를 위해 치르신 대가를 기억나게 합니다. 그 작은 십자가는 날마다 내가 받은 은총에 감사해야 한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고 내가 하는 모든 말과 행동 안에서 그분을 더 잘 섬기도록 도와줍니다. 그것은 또 매일 나의 스승님을 아는 모든 사람들과 그분의 돌보심에 의탁하는 사람들과 내가 나누는 평화와 위로를 기억하게 해줍니다. 그래서 내가 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삶을 돌봐주시도록 허락하기만 한다면 그분이 내 삶의 주인이시라는 것을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나에게 상기시켜 주기에 십자가를 호주머니에 늘 넣고 다닙니다’.
우리가 항상 주님을 생각하고 느끼고 생활한다면 어떠한 상황에서도 복음적 가치를 선택할 수 있는 용기와 지혜를 가질 수 있다. 그러나 내 생각과 욕심이 내 생활을 지배한다면 ‘예’ 해야 할 때 ‘아니오’ 할 수 있고, ‘아니오’ 해야 할 때 ‘예’라고 할 수 있다. 겸손이란 늘 호주머니에 십자가를 넣고 다니며 선택의 순간에 그리스도의 생각과 그리스도의 판단에 맡겨 바르고 복음적인 결단을 내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일상의 삶 안에서 매순간 순간의 응답 안에서 늘 마음 안에 겸손이 배어 있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겠다.
“아예 맹세하지 마라.”
-양승국신부-
<혹시 하느님께서 허락하시면>
‘맹세 하지 마라’는 예수님의 권고를 묵상하면서 같이 살았던 아이들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그 녀석들 저한테 거짓 약속 엄청 많이 했거든요.
“신부님, 이번 한번만 도와주세요. 다시는 이런 일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을 두고 맹세합니다.”
“신부님, 나중에 내가 어른 되면 돈 많이 벌어서 1년간 외국 여행 시켜줄게요. 왜요? 거짓말인줄 알고? 두고 보세요.”
그런 아이들 못지않게 저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간 아이들이 제게 붙여준 별명이 많았는데, 이런 별명이 주류를 이루었습니다. ‘양뻥’ ‘양구라’ ‘깡냉이’...
원인이야 이렇습니다. ‘주말에 같이 놀러가요’ ‘영화 하나 보여줘요’ ‘한 잔 사주는 거죠?’ ‘생일선물로 반지 사주기로 약속한 것 안 잊었지요?’ 등등의 조금은 일방적이고도 무리한 아이들의 요구 앞에서 늘 갈등을 하게 됩니다.
지키지 못할 약속이라면 애당초 안 된다고 하면 될 텐데, 마음이 약해서, 그리고 때로 건성으로, 그래 약속, 그럼 그러지, 하고 쉽게 약속해서, 나중에 아이들 실망하게 하고, 삐치게 만든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돌아보니 이웃들과의 관계, 나 자신과의 관계,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도 별반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종신서원 때 잔뜩 긴장해서, 그러면서도 폼은 있는 폼 없는 폼 다 잡아가면서, 하느님께 약속드렸지요.
“저의 형제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총장 신부님 앞에서, 살레시오회의 회헌에 명시된 복음적 길을 따라 평생토록 순명, 청빈, 정결을 살도록 서원하나이다.”
매년 연례피정 끝에 서원을 갱신할 때 마다 가장 먼저 드는 느낌은 하느님 앞에 송구스러움입니다. 형제들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총장 신부님 앞에서 발했던 순명, 청빈 정결 서원을 오늘 나는 과연 어떻게 지켜나가고 있는지 돌아보면 한심할 뿐입니다.
제 사제 서품 상본에 적은 내용이 또 떠오르는군요. 사제 서품 상본에는 한 평생 사제로 살아가면서 삼을 모토를 적게 되지요. 돈보스코의 아들이니만큼 당연히 돈보스코의 좌우명을 그대로 따라 적었습니다.
“나는 여러분을(청소년) 위하여 공부하고, 여러분을 위하여 일하여, 여러분을 위하여 살고, 여러분을 위하여 나의 생명까지 바칠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점점 더 부끄러워지는군요. ‘차라리 그런 심각한 서약을 하지나 말던지. 더 심사숙고해서 서원을 했어야지, 상본에다가는 어느 정도 적당한, 지킬만한 글귀를 적었어야지’ 하는 후회가 됩니다.
이런 우리 인간의 한계, 나약함, 지속적이지 못한 속성을 잘 파악하고 계셨던 예수님이셨기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예 맹세하지 마라.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 라고만 하여라.”
인간의 언약, 인간의 약속, 인간끼리의 계약은 근본적으로 미덥지 못한 것입니다. 유한합니다. 세월의 흐름 앞에 허물어지기 마련입니다.
불과 몇 십 년 세월 안에 생생히 체험한 일입니다. 한때 목숨까지 걸었던 이상적인 가치관들, 생사를 함께 하자던 동지들, 함께 설계했던 장밋빛 미래...세월과 더불어 많이 퇴색되어갔습니다. 다들 떠나갔습니다. 신기루처럼 사라져만 갔습니다.
결국 우리에게 있어 부담되는 언약, 지키지 못할 서약, 항구하게 지속되지 못할 약속을 남발하기보다는 이렇게 말해야겠지요.
“혹시 하느님께서 허락하시면 제가 노력해보겠습니다.” “제가 이렇게 부족해서 어쩔지 모르겠지만,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 김준한 신부-
우리가 신앙인으로 살아가면서 참 많은 기도를 드립니다. 기도 중에는 교회가 공식적인 기도문을 만들어 드리는 기도, 특별히 가톨릭 기도서에 나오는 기도들, 또 우리가 제일 사랑하는 묵주기도 등 많은 기도방식의 도움을 받아 기도를 드립니다. 그런데 한번씩 신자들의 모임을 가지고 시작과 마침에 자유기도를 드리라고 하면 잘 못하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하도 정해진 기도문에 따라 기도를 하던 버릇이 들어놔서 스스로 묵상하며 기도하는 방법을 익히지 못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성체조배를 드려도 무언가 끊임없이 기도를 드려야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히시는 분들도 가끔 있는 듯도 합니다. 그저 자신의 생활을 되돌아보며 반성하고 또 주님의 말씀을 듣는 기도가 부족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 면에서 먼저 저 자신의 지난날을 반성해봅니다. 특별히 오늘 복음말씀에 비추어 맹세하지 마라는 말씀,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 라고만 한 말씀을 얼마나 잘 지켰는지 되돌아봅니다.
솔직히 개인적으로 맹세나 약속을 했다가 낭패를 본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물론 그 맹세나 약속은 그 누구의 강요에 의해서 한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의욕이 앞서서 정말 무언가를 하고 싶은 욕심이 앞서서 맹세를 하였습니다. 또 때로는 내 말이 틀리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맹세를 하곤 했습니다. 그리고 때로는 솔직히 나 자신조차도 장담할 수 없으면서 분위기상 그렇게 하겠다고 형식적으로 맹세 아닌 맹세를 한 적도 있습니다. 물론 맹세와 약속은 좀 서로 틀린 점이 있지만 약속의 경우에도 제가 지금까지 했던 맹세의 경우와 별로 다르지 않은 형식적인 태도를 보이곤 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예와 아니요를 그렇게 확연하게 구분하신 이유는 더 이상 핑계대지 마라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맹세를 해야만 하는 상황이라는 것은 거의 대부분 나의 말이 오해받는 상황일 것입니다. 내 말이 믿지 않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내 말의 진실성을 드러내기 위해 간구하는 마지막 수단이 바로 맹세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또 누군가를 설득하고자 할 때 가장 감동적인 장면은 맹세의 순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왠지 비장하고 진지하고 자신의 온 존재를 던지는 듯한 이 맹세는 참으로 힘이 있고 또 매력적인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맹세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저 예 할 것은 예라고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 라고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참 맥이 빠지는 말씀같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는 주님의 이 말씀이 결국 진실되라는 말씀으로 느껴집니다. 누구의 오해를 받든 안받든, 혹은 나 자신의 잘못을 숨기기 위해 무언가 자꾸 말을 만들어내고 변명하지 말라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자기 자신을 방어하지 말고 무장해제하고 있는 그대로 드러내라는 초대의 말씀만 같습니다. 마치 예수님 당신께서 두 팔을 벌려 온 몸을 드러내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처럼 자기 자신을 다른 사람에게 내어 맡기는 것이 바로 예 할 것은 예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 하는 말씀의 숨은 뜻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맹세한다는 것은 오해받기 싫은 욕심, 자신의 잘못된 점을 드러내기 싫은 자존심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제일 먼저 무화과 나뭇잎으로 부끄러운 부분을 가린 것처럼 맹세한다는 것은 나의 죄를 가리고 싶은 원초적인 욕망인지도 모릅니다. 그 어떤 잘못이 나 때문이 아니라 다른 이유나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이고 나는 절대 잘못한 것이 없다는 자기변명이 때로는 맹세의 형태로 드러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래서 생각합니다. 죄를 짓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니라 이미 지은 죄를 숨기는 것이 더 나쁘다고요. 만약 저녁 무렵 산들바람이 불 때 야훼 하느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찾으셨을 때 그들이 하느님 앞에 달려와 그들의 죄를 먼저 아뢰고 용서를 청했다면 그들의 죄는 용서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오늘 복음에 나오는 예와 아니요라는 말은 별 차이가 없습니다. 예라고 할 때도 있을 것이고 아니요라고 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다만 솔직하라는 것입니다. 잘 한 것이면 예라고 대답할 것이고, 내 자신이 잘못한 것에는 아니요라고 대답하는 것이 맞습니다. 다만 자기 자신을 숨기지 않는 용기가 필요한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한 주간을 반성하면서 이처럼 자기 자신을 솔직하게 돌아보고 주님 앞에 온전히 드러낼 수 있었으면 합니다.
"아닌 것"은 끝까지 아니다.
-박상대신부-
"살인하지 말라 -> 화도 내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 음란한 생각조차 품지 말라", 그리고 "이혼장을 써 주어라 -> 아내를 소박(疎薄)하지 말라"는 산상설교의 본격적인 대당명제에 이어 오늘은 "거짓 맹세를 하지 말라 -> 아예 맹세를 하지 말라"는 네 번째 대당명제가 선포된다. 맹세(盟誓)란 자신의 증언을 다짐하는 약속을 하는 것이고, 하느님을 두고 맹세하는 것은 자신의 증언을 다짐하는 약속을 함에 있어서 하느님을 증인이나 보증으로 내세우는 것이다. 우리가 통상 (하느님께) 맹세한다고 할 때는 두 가지 종류의 맹세가 있다. 하나는 "과거지향적-단정적 맹세"이고 다른 하나는 "미래지향적-서약적 맹세"이다. 전자(前者)는 현재의 시점에서 과거에 어떤 일을 했다, 또는 하지 않았다고 단언하면서 하느님을 증인으로 내세우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율법은 "거짓 맹세를 하지 말라"(레위 19,12)고 규정한다. 후자(後者)는 앞으로 무슨 일을 하겠다는 약속이나 서약을 하면서 하느님을 증인으로 내세우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율법은 "주님께 맹세한 것은 다 지켜라"(민수 30,3)고 말한다.
어떤 형태의 맹세가 되었던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가문이나 명예를 걸고, 나아가 천지(天地)와 하느님을 걸고 맹세를 한다. 사실 과거지향적-단정적인 맹세는 불필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과거의 어떤 일을 했다거나 하지 않았다는 것을 주장하는 경우, 이를 주장하는 그 사람 자신만이 사실의 진위(眞僞)를 가장 잘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맹세가 필요할 때도 있다. 예를 들면, 사실의 진위를 말해도 주위의 사람들이 믿어주지 않는 경우가 그렇다. 이럴 경우 주위의 믿음을 얻기 위하여 되도록 비중이 큰 대상을 증인으로 걸고 맹세를 선언하는 것이다. 이 때 구약의 율법은 결코 거짓 맹세를 하지 말 것을 규정하고 있다. 미래지향적-서약적인 맹세는 아직 성사(成事)되지 않은 미래의 일을 두고 하는 맹세이기 때문에 맹세를 함으로써 일의 성취를 위한 결심과 추진력을 얻을 수 있다. 이 때 구약의 율법은 맹세한 것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요즈음 예외가 허락되지만 과거 1970년대 모든 공적인 의례에서 반드시 해야 했던 "국기에 대한 맹세"가 미래지향적-서약적 맹세의 대표적인 예이다. "나는 자랑스런 태극기 앞에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대한민국 국기에 관한 규정 제3조) 이 맹세문 통하여 당시의 국가당국은 교육적 차원에서 대한민국의 국가관(國家觀)을 확립하려고 했다.
오늘 예수께서는 어떤 경우에라도 "아예 맹세를 하지 말라"고 하신다. 더 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느님의 이름을 직접 부르지 않고 우회적으로 하느님을 지칭하는 "하늘, 땅, 예루살렘, 자기 머리" 등을 두고 맹세하는 관행까지도 나무라신다. 하늘은 하느님의 옥좌이고, 땅은 하느님의 발판이며, 예루살렘은 크신 임금님의 도성이며, 사람은 자기 머리의 머리카락 하나도 어찌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회적 수법을 사용한 것은 그들의 머리 속에 항상 "너희는 너희 하느님 야훼를 함부로 부르지 못한다. 야훼는 자기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자를 죄 없다고 하지 않는다"(출애 20,7)는 말씀이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성자의 강생으로 말미암아 도래한 하느님나라에 절대적으로 통용되는 법칙은 총체적 진실성이다. 무엇이든 "예" 할 것은 반드시 "예" 하고, "아니오" 할 것은 반드시 "아니오" 해야 한다. 맞는 것은 맞는 것이고, 아닌 것은 아닌 것이다. 이는 죽었다 깨어나도 그렇다. 맞는 것을 아무리 아니라고 우겨도 그것은 맞는 것이며, 아닌 것을 아무리 맞다고 우겨도 그것은 아닌 것이다. 끝까지 우긴다면 그것은 악(惡)이다.(37절) 그러니 이젠 더 이상 맹세가 필요 없게 된 셈이다. 그것은 예수님의 강생으로 말미암아 하느님께서 세상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이 모른다고 해서, 또는 다른 사람이 보지 않는다고 해서 자신의 행위가 감추어져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참으로 어리석은 자이다. "닭 잡아먹고 오리발 내민다"고 해서 닭 먹은 자신을 본인이 모르겠는가, 하느님께서 모르시겠는가? 하느님이 다 보고 계시고, 자기 자신이 알고 있지 않는가? 물론 억울한 경우도 있다. 억울한 것은 사람들 앞에서만 그렇다. 행한 일이 참되고 자신이 참되다면 하느님 앞에서는 억울할 게 아무 것도 없을 것이다.
우리의 입술은 성령의 친구가 되어야 - 이봉하수사-
집으로 돌아오는 골목에서 아이들이 한 아이에게 무언가 따지듯 다그치고 있었습니다. 그냥 지나치려는데 좀 더 큰 소리가 들렸습니다. “맹세해, 빨리 임마!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맹세해, 어서!” 아이들끼리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르나 한 아이에게 맹세를 요구하고 있었고, 그 아이는 쉽게 맹세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을 뒤로 하고 집까지 오면서 저도 모르게 어린 시절이 생각나 웃음이 저절로 나왔습니다. 우리 민족은 아주 오래 전부터 하늘과 땅을 섬기며 집안이나 나라에 대소사가 있을 때마다 나름대로 조건을 앞세워 맹세를 다짐해왔습니다. 설령 그 맹세가 아무런 구속력이 없더라도 그 어딘가에 마음을 전달해야 하고 때로는 목숨까지도 담보로 내놓아야 합니다. 이 맹세의 출발은 ‘예’와 ‘아니오’인데 어떠한 결정 앞에서 ‘예’ ‘아니오’를 잘하느냐 못하느냐에 따라 그 여파는 상당히 큽니다. 그래서 예, 아니오를 요구하는 질문도 신중해야 하지만 대답은 더 신중해야 합니다. 장난삼아 건성건성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어려워하는 것 중 하나가 자기표현이라 합니다. 특히 예, 아니오라고 대답해야 할 상황 앞에서 확실한 대답을 하지 않고 그냥 적당하게 어물쩍 넘어가는 경향이 외국 사람들에 비해 아주 높다고 합니다. 신앙생활 안에서 확신과 신뢰에 찬 대답은 자기발전뿐 아니라 신앙생활을 하는 데에도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맹세에 관한 가르침 - 이기양 신부-
제 1독서 : 1열왕 19,19-21 (엘리사는 엘리야를 따라나섰다.) 복 음 : 마태 5,33-37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아예 맹세하지 마라.)
구약성경에는 재미있는 성경구절이 많이 나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아브라함이 아들 이사악의 신부감을 찾기 위해 집안 일을 도맡아 보는 늙은 심복에게 분부하는 내용입니다.
ꡒ네 손을 내 샅에 넣어라. 나는 네가 하늘의 하느님이시며 땅의 하느님이신 주님을 두고 맹세하게 하겠다. 내가 살고 있는 이곳 가나안족의 딸들 가운데에서 내 아들의 아내가 될 여자를 데려오지 않고, 내 고향, 내 친족에게 가서 내 아들 이사악의 아내가 될 여자를 데려오겠다고 하여라.ꡓ(창세24,2-4)
아브라함은 심복에게 손을 자기 사타구니에 넣고 하느님께 맹세하라고 명령합니다. 사타구니에 손을 넣는다는 것은 함부로 공개하기 어려운 은밀한 일로 민망하고 부끄러운 행동일 수 있는데 이러한 행동을 하게 하는 데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하느님 안에서 한 맹세를 지키지 않을 때는 후손이 이어지지 않는다는, 즉 씨가 마르는 벌을 달게 받겠다는 뜻으로 행하던 행위로 당시 중요한 맹세 때 통용되었던 행위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주 하느님의 이름으로 맹세를 하곤 하였습니다.
ꡒ하늘과 땅을 지으신 분이시며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이신 주님께 내 손을 들어 맹세하오.ꡓ(창세14,22)
또 예루살렘 성전이나 땅, 자기의 머리나 이름을 두고도 자주 맹세를 하였습니다.
ꡒ내가 나 자신을 두고 맹세한다. 내 입에서 의로운 말이 나갔으니 그 말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다.ꡓ(이사45,23)
그런데 그러한 모든 맹세들은 십계명 중 두 번째 계명인 ꡒ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마라.ꡓ에 어긋나는 것이었지요. 특히 권력층에 있었던 사람들은 기득권을 유지하거나 자신들의 권리를 부당하게 주장하기 위하여 맹세를 이용하였고, 빚을 갚게 한다거나 남편이 아내를 소박하는 방법으로 맹세를 사용하기도 하였습니다.
신약성경에서도 맹세하는 사람들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베드로 사도이지요. 세 번이나 주님을 배반했던 베드로 사도는 주님을 알지 않느냐는 두 번째 추궁에 맹세까지 하며 부인하였고 세 번째에는 천벌을 받아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하느님과 여종에게까지 맹세를 하였습니다.
ꡒ베드로는 맹세까지 하면서 ꡐ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오.ꡑ하고 다시 부인하였다. 그런데 조금 뒤에 거기 서 있던 이들이 베드로에게 다가와, ꡐ당신도 그들과 한패임이 틀림없소. 당신의 말씨를 들으니 분명하오.ꡑ하고 말하였다. 그때에 베드로는 거짓이면 천벌을 받겠다고 맹세하기 시작하며, ꡐ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오.ꡑ하였다.ꡓ(마태26,72-74)
우리 시대에도 맹세하는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이 거짓인 경우가 많지요. 맹세에 관하여 이런 속담들이 있습니다.
ꡐ달걀과 맹세는 쉬 깨진다.ꡑ ꡐ강한 맹세는 불 속의 짚과 같다.ꡑ 셰익스피어는 ꡐ남자가 맹세하면 여자는 배반한다.ꡑ고 했으며 소포클레스는 ꡐ나는 여자의 맹세를 물에 적어놓는다.ꡑ고 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 모든 맹세를 아예 하지 말 것을 강력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ꡒ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아예 맹세하지 마라. 하늘을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 하느님의 옥좌이기 때문이다.ꡓ(마태5,34)
우리가 하는 맹세는 자기 자신보다 위대한 분이나 물건을 두고 합니다. 즉 그것에 어떤 보증을 얻으려는 것이지요. 이러한 맹세들은 잘 지켜지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고 스스로도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연약하고 한계 있는 인간이 하느님의 이름을 걸고 맹세한다는 것은 어리석음 그 자체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욕되게 해서 하느님의 진노를 자초하지 말라고 가르치시는 것이지요. 우리가 하는 그 모든 맹세는 결국 믿음이 없기 때문에 나오는 것입니다. 진실하고 착하다면 누구에게 맹세를 하거나 보증을 받지 않더라도 사람들이 그 말을 믿을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 그 어떤 것을 두고도 맹세하지 말라고 하시며, "너희는 말할 때에 '예' 할 것은 '예'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마태5,37) 하고 가르치셨습니다. 특히 그리스도인은 가벼운 맹세가 아니라 진실한 삶으로 보여주어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