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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과정과 교과서를 사랑했던 나의 신변잡기 본문
* 다음 글은 "편수의 뒤안길" 제11집(한국교육과정교과서연구회, 2012.3.30)에 게재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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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과정과 교과서를 사랑했던 나의 신변잡기
이 경 환
(한국교육과정‧교과서연구회 사무총장)
Ⅰ
아쉬움이 더 많았으나 2006년 2월말, 42년의 교직생활을 마무리하고 이제는 이런저런 봉사활동으로 세월을 보내고 있습니다. 뒤돌아보면, 1964년 3월 7일 서울창신국민학교 교사로 첫 발령을 받은 후 18년 6개월 동안은 교실에서 아이들을 가르쳤으며, 다음의 18년 동안은 교육부에서 교육과정과 교과서를 사랑하는 일을 참으로 열심히 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5년 6개월 동안은 초등학교 교장으로서 학교 교육과정 행정을 살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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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2년만 하고 그만둔다고 생각했던 일이었으나 참으로 어려웠던 세월이 지나가면서 결국은 내 스스로가 좋아서, 내가 하는 일들이 좋아서, 책들이 좋아서, 그리고 따스한 정을 나눌수 있는 사람들이 있어서 가르치고 배우는 일을 그렇게 사랑하게 되었나 봅니다. 그러나, 그 동안 남에게 베풀지는 못하면서 무언가 움켜잡고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나 싶어 그것이 못내 아쉽기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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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더 잘하고, 좀 더 베풀고, 좀 더 사랑하지 못했던 일들이 부끄럽지만, 특히 18년 동안 정열을 바쳐 프로 정신으로 일한 교육전문직 생활을 회고하며 (그 것마저도 제 자신의 신변잡기에 불과하지만) 편수국의 선후배, 동료들과 나눈 따뜻한 사랑과 믿음, ‘인간미’를 (지금은 편수조직이 사라져 가고 있지만 교육과정과 교과서 관련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우리 선생님들에게 이야기를 전하고 싶어 ‘편수의 뒤안길’에 이 글을 담아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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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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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교과용도서실험.연구학교인 서울윤중국민학교에 근무하면서 교감 자격 연수를 받고 연수 성적도 우수하여 교감 발령이 나기를 기다리던 시기인 1982년 8월 말경이었습니다. 느닷없이 문교부 장학편수실에서 들어오라는 연락을 받고, “또 무슨 일을 시킬 것이 있나 보구나.”하는 생각을 하면서 문교부로 들어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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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그 이전에 근무하였던 서울서교국민학교는 문교부지정 국어과연구학교이어서 가끔 연구 협의차 들어가기도 하고 국어 교과서 심의 또는 교과서 집필 원고를 작성해야 하거나 새마을 교육에 관한 책을 발간할 경우, 그리고 기본생활습관 지도 자료를 정리할 경우에 간혹 불러서 일을 시키기도 하였기에 무슨 일감을 주는 것으로 생각한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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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게 아니었습니다. 서울특별시 교육청에서 3배수로 추천된 사람들을 모두 불러 놓고 교육과정담당관실에서 일할 교육연구사를 뽑기 위해 논술과 면접 시험을 보는 공채 시험 자리였습니다. 추천되어 같이 들어온 사람들은 다 아는 분들이었으나, 제가 나이도 제일 어리고 마지막으로 추천된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편한 마음으로 묻는 말에 답변하고 시험 답안도 작성하였습니다. 면접의 내용은 ‘교육과정이란 무엇인가’라는 교육과정과 관련된 내용들이어서 나의 생각을 조리있게 이야기할 수 있었으며, 시험 문제도 교감 자격 시험 때 대부분 공부한 내용들이어서 나름대로 거의 막힘없이 척척 답하였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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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족함이 많은 사람의 신변잡기를 언급하게 되어 매우 쑥스럽고 민망하기 이를 데 없으나, 그 당시만 해도 국민학교에 근무하면서 대학원을 졸업한 사람은 지금처럼 많지도 않았을 뿐더러 문교부 지정 연구학교의 연구 주임으로 여러 차례 전국 공개 보고회를 개최한 경험이 있고, 국어과 교육과정 심의 위원, 국어과 교과서 집필 위원, 그리고 교과용 도서 실험.연구 학교 근무 경력과 연구교사 금상 수상 실적 등을 두루 갖춘 선생님들이 별로 없었던지 그 중에서 나이가 제일 적은 제가 문교부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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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알게 된 일이기는 하지만, 교육과정담당관인 김상대 장학관님이 적극, 선택하여 문교부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하였습니다. 당시의 문교부에는 각 시.도 교육청에서 발탁되어 오신 사람들이 많이 배치되어 있었으며 서울시교육청에서도 제가 서울에서 뽑혀 들어가니 서울 교육을 위해 문교부에 가서 열심히 일해 달라는 당부의 말씀을 듣기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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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9월9일자로 문교부장관의 발령을 받고 장학편수실의 교육과정담당관실에서 교육연구사로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소속되는 방의 명칭에 ‘실’이라는 명칭이 두 번 들어가 있는 데, 이는 장학 행정 우선의 사고 방식에 따라 편수국과 장학실이 합쳐지면서 생겨난 교육전문직 축소의 조직 체계인 것으로 짐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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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의 교육과정담당관실은 18층 남쪽 제일 끝방에 위치하였는 데, 저 멀리 남산 타워가 보이고, 서울 시청과 동아, 조선, 서울 등 여러 신문사들이 휜히 내려다 보이는 전망이 매우 좋은 곳이었습니다. 또 남향이라 하루종일 햇볕도 아주 잘드는 방이었습니다. 얼마 후 18층 중간 서쪽에 위치한 1811호실, 1812호실로 자리를 옮겼으며, 19층에 서고 겸 자료실과 회의실이 있어 교육과정 기초 연구 자료, 교육과정. 교과서 관련 문서, 그리고 수 많은 국내외 교과서들이 보존되어 있었습니다. (편수국에 서고 및 자료실, 회의실 등은 필수적인 시설이라는 인식은 그 후 2002년까지도 계속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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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에는 2002년에 돌아가신 이규호 교수님이 문교부장관이었고, 차관에는 정태수 학장님, 그리고 황철수 선생님이 장학편수실장이었습니다. 편수국장을 편수관리관이라 했는데 정태범 교수님이 편수관리관이었고, 김상대 장학관이 교육과정담당관을 맡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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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의 편수국 (장학편수실의 편수관리관 체제)은 교육과정담당관실, 인문과학편수관실, 사회과학편수관실, 자연과학편수관실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담당관과 각 편수관은 3급(부이사관) 상당의 국장 대우를 받는 조직 체계였으며, 편수관리관실이 별도로 있었습니다. 참고로 장학실은 교육연구장학관실, 정신교육장학관실, 교과지도장학관실, 생활지도장학관실의 네 개 부서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마찬가지로 각 장학관은 국장급으로 대우받고, 장관실이 가까운 16층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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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과정담당관실에는 김상대 교육과정담당관과 임대영, 함수곤, 한상진 등 세 분의 교육연구관, 그리고 제가 교육연구사로 함께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다음해에 조길준 교육연구관이 오셨는데, 김상대, 임대영, 한상진, 조길준 등 네 분은 서울사대 동기 동창으로 직급과는 상관없이 항상 즐겁고 재미있게 생활하는 모습을 제게 보여 주기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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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다른 방과는 달리 직급에 관계없이 양수 책상 (서랍이 두 줄로 양쪽에 있는 책상으로 사무관급 이상의 관급 공무원이 쓰는 책상을 말함.) 네 개를 마주 붙여 놓고 서로 협의도 하고 토론도 해 가면서 교육과정 연수 자료 발간, 교육과정 연수 등과 같은 동일한 업무를 다 함께 처리해 나갔던 일들이 지금 생각해도 참으로 특이할 만 하다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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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 임대영 교육연구관이 특수학교 교육과정 개정 업무를 주관하면 다른 사람들도 특수학교의 영역별이나 학교급별로 업무를 나누어 맡아 다 함께 특수학교 교육과정 개선 업무를 추진하였고, 함수곤 교육연구관이 교육과정 연수 자료 발간을 주관하면 교육과정 연수를 시행하기까지 세부적인 역할을 분담하여 다 같이 함께 도와가며 일을 해 나갔습니다. 오늘 조간 신문에 ‘자라나는 학생들에게 창의력을 어떻게 신장시킬 것인가?’라는 기사가 게재되었다면 이 문제를 가지고 ‘교과서는 어떻게 구성하는 것이 좋은가’라는 협의를 집중적으로 전개하고 이를 정리하게 하기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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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 12. 31 제4차 교육과정 개정 고시한 후, ‘82년 1월과 2월에 걸쳐 KBS TV를 활용하여 교육과정 개정과 교과서 개편에 따른 교원 연수를 전국적으로 시행하고, ‘82. 3. 1부터 국민학교 1, 2, 3학년 전체와 4, 5, 6학년의 도덕과, 사회과, 중학교의 도덕, 국사 및 고등학교의 국민윤리, 국사 교육과정이 이미 시행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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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제가 발령을 받았을 때에는 국민학교 4, 5, 6학년의 교과서 편찬, 특별활동 교사용 지도서 편찬, 그리고 중학교와 고등학교의 교육과정 연수 자료 발간과 교원 연수 업무 등 교육과정 개정에 따른 후속적인 지원 업무를 추진하느라 한참 바쁜 시기였습니다. 거기에다 교과용 도서 실험 학교 운영 지도와 장학 협의 등으로 일선 교육 현장을 방문하는 기회가 많았을 뿐만 아니라 특수학교 교육과정 제정과 개정을 위한 각종 기초 조사와 실태 분석 등의 기초 연구 추진, 그리고 교과용 도서 심의회 운영 등 참으로 많은 일들을 새로 들어온 교육연구사 혼자서 보조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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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구나 38살의 젊은 나이에 교감 자격 연수도 끝내고 들어 온 이 신참을 선배님들은 과연어떻게 이끌어 주었던가를 이야기 하고자 이렇게 서두를 길게 쓰게 되었습니다. 김상대 장학관과 함수곤 연구관은 이런 저에게 문교부에 근무하는 교육 전문직, 특히 편수 업무 담당자의 자세와 태도는 어떠해야 하는가를 차근차근 깨우쳐 주고 형제와 같이 다정 다감하게 알려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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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편수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교육 전문직은 교육과정 조정자(Curriculum Coordinator)의 역할을 수행하여야 하기 때문에 전문직 중에서도 최고의 전문직이라고 강조하였습니다. 다른 나라에서도 교육과정을 조정하는 사람을 교육 전문직이라고 말한다면서 특히 고도의 전문적인 편수 업무를 바르게 수행하기 위해서는 ‘도적성’, ‘인간미’, ‘예의 범절’, ‘에티켓’을 제대로 갖추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새로 들어온 풋내기 교육연구사에게 참으로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습니다만, 그 중에서도 잊을 수 없는 몇가지 일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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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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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과정과 교과서 등 편수 업무를 담당하는 교육전문직은 교육과정 조정자로서의 역활을 수행하여야 하기 때문에 교육과정에 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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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를 계속하도록 이끌어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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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우리 나라의 각급 학교 교육과정 자료를 정리, 정비해 나가도록 하였습니다. 교수요목 시기부터 제4차 교육과정의 시기에 이르기까지 교육과정 변천 자료를 정리하여 표로 만들고 없는 자료는 국립도서관, 국회도서관, 정부문서보관소 등을 찾아다니면서라도 복사해 놓도록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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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과정 변천 자료를 정리하는 일은 저에게는 너무나 큰 공부가 되었으며, 자료의 기록과 보존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교육과정 문서는 보관 문서함에 넣어 두고 영구 보존해야 하는 데, 과연 지금은 어떻게 되고 있는지 궁금하기만 합니다. 컴퓨터만 믿고 무엇이 어디에 어떻게 들어있는지도 모르고 혹시 내 팽개쳐 두고 있지는 않은지 못내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제가 교육부를 떠나 오기 전에 관련자료를 컴퓨터에 담아 두고, 총론부터 시작하여 교과별로 교육과정 원본을 영인본으로 만들어 두고 나온 것은 참으로 잘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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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교육과정 자료를 정리하면서 교육학, 교육과정, 교육행정, 교육법규 등 관련도서를 읽고 국가 수준의 교육과정 기준과는 어떤 관련이 있는지를 찾아 정리하도록 일감을 맡기고 관련 공문서를 정비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렇게 하였더니 무슨 문서는, 무슨 자료는, 어디에 있고, 어떤 책이 어디에 어떻게 보관되어 있는지를 훤히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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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우리 나라의 교육과정이 개선되는 과정을 일러 주고, 업무 처리의 흐름도를 만들어 보고, 무엇을 어떻게 수정, 보완해야 하는지를 정리하여 김상대 담당관님께 보고하도록 하였습니다. 그 때 만든 교육과정 개정 업무의 흐름도는 약간의 수정을 거쳐 지금도 활용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 당시를 회상해 보면 교육과정을 담당하는 편수관은 그 자리에 오래 머물면서 적어도 교육과정 개정의 한 기간이 지나야 ‘아하’ 하면서 그제서야 교육과정 개정의 과정을 알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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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교육과정 방에 잠깐 있었다고 해서 교육과정을 다 안다고 말하는 것은 정말 거짓이라고 생각합니다. 스스로 체험하고 깨닫지 못한 사람은 그 분야의 전문가라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육과정을 담당하는 전문가는 그 자리에 오래 있어야 하는 데, 툭하면 교육과정이 뭔지도 모르는 사람을 책임있는 자리에 앉히거나 알지도 못하는 사람으로 갈아치우고 전문 인력을 멋대로 줄이는 그런 일들은 이제 반복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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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교육과정 개정 업무 처리의 흐름을 일깨워 준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 보면, 먼저 교육과정 개정 기본 계획이 어떻게 수립되는지 그 자료를 정리해 보고, 자원 인사의 명단 확보 방안, 예산 확보, 연구. 협의. 실무진의 구성에 대한 기본적인 생각을 함께 토론하고 협의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큰 도움이 되었던 것은 교육과정을 바꾸어 나가기 위해서는 어떠한 기초 연구를 수행하여야 하는지를 하나씩 점검해 보도록 한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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➀ 교육과정 체제․ 구조 개선을 위한 기초 연구 자료 분석,
② 현행 교육과정의 분석․ 평가,
③ 교육과정 국제 비교 연구,
④ 학생・교원・학부모의 요구 및 의견 조사,
⑤ 국가・사회적인 요구 및 학교 교육의 전망 조사 연구,
⑥ 각 교과별 교육과정 운영・실태 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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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과 같은 일이 이루어지고, 이를 통한 시사점을 추출하여야 교육과정의 개정 방향을 설정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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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과정을 개정하기 위해서는 항상 이러한 기초 연구들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이러한 연구가 어떻게 이루어지며 그 내용이 어떠한지를 잘 알지도 못하면서 주먹구구식으로, 교육과정 개정이 행정 명령에 따라 즉각 이루어지는 것(요즘은 아무 때나 고쳐도 되는 것으로 착각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으로 잘못 생각하는 교육 행정가들이 아직도 많다는 사실은 과연 무엇을 말해 주는 것일까요? 적어도 교육 전문직은 교육과정을 알아야 하며, 그래야 우리 나라의 교육 방향을 제대로 제시할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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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수준의 교육과정 기준에 제시되어 있는 각급 학교의 교육 목표는 무엇인지, 과연 어떠한 사람을 기르려고 하는지, 교육 중점은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자꾸 시책 중심의 엉뚱한 소리만 하고 있으니, 과연 이들을 보는 교사의 눈은 어떠한지를 한번 생각해 보셨는지 되묻고 싶기도 합니다. (행정지시로 교육과정을 바꿀려고 하는 사고방식은 아직도 여전히 그대로 남아있는 것 같습니다. 누가 체육시간을 1시간씩 더 넣어라고 하면 그대로 해야하는 한심한 일도 마구 일어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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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교육과정 심의회나 교과용 도서 심의회가 이루어지는 과정에는 저를 대동하고 들어가 그 과정을 지켜보도록 하고, 교육과정 업무 담당자로서 어떤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지를 일깨워 주었습니다. 교과용 도서 실험학교나 교육과정 연구학교에 가서는 무슨 내용으로 협의회를 어떻게 진행해야 하는지, 그 결과는 어떻게 정리하여 반영해야 하는지를 직접 보여 주는 일도 많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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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 좋은 교과서를 만들고 학생들의 사고력을 신장시켜 나가기 위해 교과서 정책이 어떻게 변화되어야 하는지, 그리고 다른 나라에서는 어떻게 하고 있는지를 공부하게 하였습니다. 특히 함수곤 연구관은 1종 도서(요즈음은 국정 도서라고 합니다만, 사실은 연구 개발 위탁형으로 편찬되는 도서로 그 저작권이 국가에 있기 때문에 흔히 국정 도서라고 부르고 있음.)의 편찬 절차를 기다란 종이에 50가지 과정을 적어 그 과정마다 교육부에서는, 연구 개발 위탁 기관에서는, 그리고 출판사에서는 무슨 일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하나하나 가르쳐 주고, 편수 업무 담당자는 어떤 역할을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지를 생각해 보게 하였습니다. 이와 함께 2종 도서(검정) 편찬 절차도 이야기하고, 앞으로 교과서 정책의 개선 방향을 어떻게 설정하여야 하는지도 정리해 보도록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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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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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전문직은 언제 어디서든지 ‘겸손’해야 함을 이야기하고, 이를 실천으로 보여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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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들어 온 교육연구사에게 베풀어 준 훌륭한 선배님들의 가르침은 모두 열거하기가 어려울 정도여서 어떤 사람들은 저를 보고 참 좋은 선배님들을 모시고 있는 행운아라고 하며 부러워 하기도 하였습니다. 함수곤 연구관은 전화가 오면 항상 친절하고 자상하게 응대해 주었습니다. 하루는 외부에서 전화가 왔을때 자기 자신을 어떻게 말해야 ‘목에 힘을 주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을 하면서 다음의 번이나 번 중에서 어느 것이 옳은가를 생각해 보라고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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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교육과정담당관실에 근무하는 교육연구사 이경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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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교육과정담당관실에 근무하는 이경환 교육연구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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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번이나 2번이 서로 비슷한 것 같지만 소속이나 직위를 먼저 이야기하고 자기 이름을 말하는 것이 바르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될 수 있으면 자기 이름을 부드럽게 이야기하는 것이 상대방에게 편안함을 느끼게 하고 겸손함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이야기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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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고 하면서 교육 전문직이든 교감, 교장이든지 간에 직원 상호 간에 좋은 인간 관계를 맺도록 노력하고, 다른 사람으로부터 ‘친절하다, 예의바르다, 남을 도와 주려고 노력한다.’ 등과 같은 이야기를 듣고, 칭찬을 받아야 한다고 말하였습니다. 다른 사람을 만나도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항상 겸손하게 상대방을 대하여 다른 사람이 편한 마음을 갖도록 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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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가르침이 바탕이 되어 저는 지금도 어디에서 전화가 오면 ‘어디에 근무하는 아무개입니다’ 하고 이야기 합니다. 제가 어느 지역이나 학교에 방문 출장을 가게 될 경우에는 사전 협의를 통하여 무슨 일을 어떻게 처리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제시하고 그에 따른 자료를 미리 준비하게 하였습니다. 또한 제가 출장을 가서 만나야 할 상대방에게 저에 대하여 자상하게 소개하기도 하고, 무슨 일을 어떻게 처리하였는가 하는 상대방으로 부터의 평판도 전해 주기도 하면서 출장 결과 복명한 내용에 대한 칭찬도 아끼지 않은 것으로 기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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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업무 처리를 일깨워 준 이후에는 저에게 교육과정 방의 곳간 열쇠도 맡기고, 출장 가서 복명하는 일도 시켜 보곤 하면서 저를 지도해 준 자상한 선배들이었습니다. 그분들에게서 잊을 수 없는 것이 바로 ‘도덕성’, ‘인간미’, ‘예의범절’, ‘에티켓’을 강조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교육 전문직은 겸손해야 함을 이야기하고 실천으로 보여 주었습니다. 업무 처리에서는 맡은 일에 대한 책임 의식을 지니고 정성과 정열을 다 바쳐서 즐겁고 재미있게 일하는 프로 정신을 발휘해야 함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전문성을 신장시켜 나가기 위해서는 부단히 노력하여야 함도 틈틈이 깨우쳐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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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지금도 교육인적자원부, 시・도 교육청과 지역 교육청, 또는 교육연구원이나 교원연수원에 근무하고 있는 교육 전문직을 보면 그들의 자세와 태도를 눈여겨볼 때가 많습니다. (이 글을 쓸 당시 저는 서울목동초등학교 교장이었습니다.) 참으로 그들을 아끼고, 그들의 태도가 변화되기를 기대하면서, 그들의 능력을 믿고 사랑하기 때문입니다만, 경우에 따라서는 아직도 변화되지 않고 있는 태도와 자세를 보면서 씁쓸해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교육도 변화하고, 교육과정도 변화하고, 학교도 변화하고 있는데, 왜 아직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지 교육 전문직의 역할과 자세를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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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히, 정태범 편수국장님의 지도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틈만 있으면 저를 불러 교육과정에는 그것이 달성하고자 하는 정신이 반영되어 있는 데, 이것을 ‘교육과정 정신’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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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차 교육과정에는 국민 정신 교육, 과학 기술 교육, 전인 교육이라는 세 가지 중요한 정신이 반영되어 있고, 이러한 교육과정 정신에 따라 ① 기초 교육이 더욱 강조되었고, ② 교육 내용의 양과 수준이 적정하게 통합, 조정되었다는 것을 이야기하곤 하였습니다. 또, 제4차 교육과정에서부터는 어떤 단일한 교육 사조나 이론의 지배를 받는 것보다는 종합적인 접근 방식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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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교과 중심 교육과정이라든지, 생활 중심, 경험・학문 중심 교육과정이라고 하는 교육 사조를 교육과정에서는 균형과 조화를 이루어야 하기 때문에 개인적, 사회적, 학문적인 적합성의 조화가 있어야 하며, 이를 위해 제4차 교육과정은 단일한 교육 사조와 이론의 지배를 탈피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국장님의 생각을 어느 정도 제가 알아들은 것으로 판단되면 각종 원고 등을 정리하고 초안을 잡아 오도록 일을 맡겨 주기도 하였는 데, 정 국장님의 생각에 맞게 글을 작성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글을 읽어 보고 공부하는 기회가 생겨 오히려 제가 고맙게 생각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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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제4차 교육과정의 시기에는 교육부에 들어와 교육과정이 무엇인가를 다시 깨닫게 되는 기회가 되었고, 국어과 교육과정 심의 위원, 특별 활동 지도서 집필 위원 등으로 활동하고, 교육과정 연수 자료 발간, 각종 교육과정 연수회 운영, 교과용 도서 실험학교 운영 등에 참여하기도 하였습니다. 특히 교육과정 심의회 등의 구성・운영에 따른 실무적인 일을 처리했기 때문에, 많은 분들과 소중한 인연을 맺고, 그들의 의견을 청취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된 것을 지금도 더없는 기쁨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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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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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9월부터 1988년 4월까지 6년 가까이 교육과정담당관실 교육연구사로 근무하면서 제4차 교육과정의 후속적인 지원 연구, 특수학교 교육과정 개정, 그리고 제5차 교육과정 개정의 실무를 맡아 왔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공부를 하게 된 것은 임대영, 조길준 연구관의 지도를 받아 가면서 맹학교, 농학교, 정신박약학교, 지체부자유학교 등 특수학교의 교육과정을 새로 제정하다시피 한 일이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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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에 대구대학교 김정권 교수님께 위탁한 특수학교 교육과정 개정 기초 연구를 토대로 1983년 12월 31일 문교부 고시 제83-13호로 특수학교 교육과정을 대폭적으로 개정하고, 또 새로 제정한 일이었습니다. 특수학교 교육과정이라면 간단한 것처럼 보이나, 그것이 그렇지 아니하였습니다. 장애 영역에 따라 맹학교, 농학교, 정신박약학교, 지체부자유학교로 구분했으나 유치부, 초등부, 중학부, 고등부가 있는데다가 정신박약학교는 교육 가능급과 훈련 가능급으로 나뉘어 있어 일반 학교의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전체를 다 망라하는 포괄적인 개정 또는 제정의 방대한 작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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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일을 주관하였던 임대영 교육연구관은 김상대 장학관이나 이돈희・이홍우 교수 등과 동기 동창이었으며, 특히 이돈희 교수님과의 교분이 매우 두터웠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임대영 연구관은 저를 무척이나 사랑하고 아껴 주셨는데, 독일어 공부를 열심히 하여 1984년부터 주 독일대사관의 교육관으로 근무하다가 귀국하여 서울윤중초등학교 교장으로 재직하셨는데, 1989년 지병인 심장병으로 학교에서 갑자기 돌아가시게 되어 참으로 안타깝고 서운하였습니다. 아마 살아 계셨다면 서울 교육계의 거목으로 우뚝 섰을 분이시라고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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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부터는 함수곤 연구관님이 일본으로 유학을 가셨기 때문에 다시 돌아온 1987년까지는 교육과정 개정 업무의 실무를 혼자서 처리하느라 참으로 바쁜 시기였습니다. 1983년의 특수학교 교육과정 개정에 따라 특수학교의 교과용 도서 개편 작업이 이루어졌는데, 당시의 특수 교육에서는 일반 학교에서 쓰는 교과서를 그대로 특수 교육에도 적용해 주기를 요구하는 일이 많아 교과 담당 편수관들의 노고(어려움)가 참 많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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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교육부에 들어온 후 김상대 장학관의 권유로 연세대학교 외국어 학당에 다니면서 일본어 코스를 4급까지 공부했으나 제5차 교육과정의 개정 업무 처리가 폭주함에 따라 더 이상 일본어 공부를 계속할 수 없었던 것이 참으로 아쉬웠습니다. 그 당시 교육과정 방에 들어오면, 김상대 장학관은 독일어, 프랑스어를 공부하고, 임대영 연구관은 독일어를 공부하느라 전화가 걸려 와도 독일어로 말하고, 한상진 연구관은 박사 논문을 쓰느라 영어를 공부하고, 함수곤 연구관은 일본어를 공부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하루는 저도 덩달아 일본어 책을 펴 놓고 있는데 이영교 실장님이 와서 격려해 주셔서 쑥스러워하기도 하였습니다. 지나간 이야기입니다만 그 당시에는 사무실에서 틈틈이 외국어를 공부하는 것은 업무의 연속으로 생각하기도 하였고 서로 격려해 주는 경향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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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부터 시작된 제5차 교육과정 개정시에는 김철연 장학관이 교육과정담당관이었습니다. 김진, 김성기 연구관, 그리고 저와 소정자 연구사가 교육과정담당관실에 근무하였는데, 역시 업무 처리의 실무 등 뒷치닥거리는 제가 맡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4차 교육과정의 적용에 따라 1984년부터 현행 교육과정에 대한 분석 평가를 추진하였는데, 초등학교의 교육 현장에서는 교과서 통합과 교과 통합 운영에 따른 평가 방안의 개선을 해 달라는 요구가 강하게 제기되었고, 특히 실업계 고등학교의 교육과정이 실러버스 위주로 제목이나 주제만 나열되어 있어 교과서가 대학 교재보다 더 어렵다는 비판이 대두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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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제5차 교육과정은 전면 개정을 전제로 한 것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제4차 교육과정과 교과서 중에서 ‘개선이 필요한 부분만 개정하는 부분 개정’을 원칙으로 하여 손제석 장관의 결재를 받아 1985년 6월에 한국교육개발원에 기초 연구를, 그리고 1986년 2월에는 유치원과 초・중・고등학교의 학교급별로 개정 시안 개발을 위탁한 것이었습니다. 당시의 김철연 교육과정담당관은 성품이 곱고 참으로 인자한 분이셨으며 주어진 업무에는 강한 추진력을 보인 분이셨습니다. 다른 시기와는 다르게 교육과정담당관실 자체로 현행 교육과정에 대한 실태 분석을 먼저 해 놓고 문제점을 각 편수관실과 협의해 나갔으나 접근 방법에서 서로 다른 의견을 보인 일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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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차 국민학교 교육과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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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1, 2학년에 통합 교과를 신설하고 통합 교육과정을 마련하였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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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제4차의 통합 교과서에서 1, 2학년의 국어, 산수를 독립시켰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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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국제 비교 결과 우리 학생들의 수업 시간 수가 비교 국가 중에서 상대적으로 적어 연간 수업 시간 수를 증가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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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 특별 활동 시간 운영을 현실화하였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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⑤ ‘1교과 1교과서’의 고정 개념에서 벗어나 ‘1교과 다교과서’ 체제로 전환하여 다양한 학습 자료 개발의 근거를 마련해 주는 등 매우 특색 있는 교육과정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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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교과 활동의 평가 결과를 문장으로 기술하게 하여 ‘생활 기록부 기록 방법의 개선’을 통해서라도 교육 평가의 본질을 찾고자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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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3월 1일에는 먼저 중학교 교육과정을 개정하고, 1987년 6월 30일에는 초등학교 교육과정, 그리고 1988년 3월 1일에는 고등학교 교육과정을 개정하는 등 학교급별로 점진적, 단계적으로 개정 업무가 추진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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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차 교육과정을 개정한 후 저에게도 자리 이동과 약간의 변화가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당시에는 박용진 학장님이 장학편수실장이셨는데, 장학실에도 교육과정 개정 내용을 아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면서 저를 생활지도장학관실로 발령을 내어, 국회가 열리면 실장님을 모시고 국회로 나가는 일이 많아지게 되었습니다. 1988년 4월 11일부터 1989년 2월 28일까지 생활지도장학관실에 근무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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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7월 4일부터 8월 11일까지 한국교원대학교 종합교원연수원에서 박승헌 연구관과 함께 교장 자격 연수를 받았는데, 생활지도장학관실의 업무를 미리 처리하거나 토요일, 일요일에도 사무실에 나와 밀린 업무를 처리하였던 일이 기억납니다. 제가 교장 자격 연수를 받을 때에는 서울에서는 24명이 초등교장 자격 연수에 차출되어 참 많은 분이 자격 연수를 받는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격세지감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 때의 초등교장 자격 연수 동기들을 ‘88회’라고 했는데, 다들 정년 퇴임을 하고 제가 ‘88회’에서는 이제 마지막으로 정년 퇴임을 하는 것으로 짐작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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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지도장학관실에서의 업무는 생활 지도 기본 계획을 수립하는 일이었는데, 사실 이러한 일들은 교육부에서 ‘콩 나와라, 팥 나와라’ 할 것이 아니라 지역이나 학교 실정에 알맞게 각 단위 학교에서 계획을 수립, 운영할 수 있도록 자율・재량의 권한을 학교장에게 주어야 하는 것이 올바르다고 하겠습니다. 어찌하여 우리의 교육부는 각 지역 교육청이나 시・도 교육청에서 처리해야 할 민원을 가지고 씨름하고 저희들끼리 공문서나 주고받으며 서로 괴롭히는 일을 아직도 계속해야 하는지 모를 일입니다. 교육 전문직이 해야 할 일이 과연 무엇이며, 특히 교육부의 편수전문직이라면 무슨 일을 어떻게 해야 할지 다시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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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대 장학관님이 교육과정담당관을 하다가 교과지도장학관으로 보직을 바꾼 일도 있었는데, 그 당시 그 방에 계신 분들에게 일선 학교로 공문을 내려보내지 말라는 엄명을 내린 일화가 기억나기도 합니다. 교육부가 바쁘면 시.도 교육청이 더욱 바빠지며 덩달아 학교가 바빠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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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12월에 새로 장기옥 차관이 부임해 오셨습니다. 작은 키에 당차고 머리 좋은 분으로 알려져 있었는데, 교육연구사들에게 자기가 맡은 일에 대한 새로운 아이디어를 A4 용지 두 페이지 정도로 제출하라는 명을 내렸습니다. 저는 김 장학관님과 협의하여 교육과정 업무 처리 흐름을 플로차트로 작성하여 성의껏 제출하였습니다. 연말경에 차관실에서 들어오라는 연락을 받고 들어갔더니 장기옥 차관님께서 제가 제출한 자료가 참 잘 되었다고 칭찬해 주셔서 정말 기뻤던 기억도 새롭습니다. 이 일이 있은 후 제가 교육연구관으로 승진하게 되었는데, 다른 사람들이 아마 장기옥 차관과 박용진 실장님이 돌보아 준 덕분일 거라고 저에게 이야기해 주기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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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3월 1일에 교육연구관으로 승진하여 대통령 발령(보통의 발령장보다는 2배로 크고 커다란 도장이 ‘쾅’ 하고 찍혀 있는 발령장)을 받고, 문교부 중앙교육평가원 출제관리부 어문교과실로 부임하였습니다. 어문교과실에는 허경덕 장학관이 있었으며, 심광한 부장님이 출제관리부의 일을 맡고 있었습니다. 어문교과실에는 교육연구사가 5명, 파견 교감이 2명, 파견 교수가 2명이 있었는데, 기능직 1명과 저와 장학관을 합하면 모두 12명이 근무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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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는 각종 국가 고사(유학 시험, 검정 고시, 대학 입시)와 관련된 시험 문제 출제와 학력 평가 업무를 담당하고 있었는데, 한번 출제하러 들어가면 15일에서 한 달까지 감금당하여 일하는 곳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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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분들이 도와 주셔서 일 년 반 동안 그런대로 재미있게 지내던 중에 하루는 심광한 부장이 서울시교육청에서 자네를 교장으로 달라는데 가겠느냐고 하였습니다. 물론 발령을 내 주면 가겠다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알고 보니까, 당시 각 지방에서 올라와 장학실에서 근무하던 교육연구관, 장학관 등 5명 정도가 서울 전출을 희망했는데, 서울에서는 이들을 받아 줄 수가 없다고 하니까, 외국에서 근무하다 귀국하는 교육관들의 관급 자리도 마련해야 하니 그럼 누굴 받겠느냐고 협의한 결과, 서울에서 교육부로 와서 교장 자격 연수까지 받은 저를 달라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당시의 서울시교육청 인사 담당은 권석주 장학관이었고, 김완기 장학사가 인사 주무를 담당하고 있었는데, 모두 저를 너무나 잘 아는 분들이셨습니다. 김완기 교장 선생님은 저를 만나면, 당시에는 교장 임기제가 시행되기 이전이어서 마르고 닳도록 오랫동안 학교장을 하라고 저를 뽑게 되었다는 농담을 한 일도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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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교육청에서는 제가 나이도 적고 아직 기회가 많은 것으로 생각하고, 처음 교장으로 나오는 것이니까 당시에는 준 특수 지역(3년 근무)으로 분류되던 용산의 산꼭대기에 있는 24학급짜리 서울원효초등학교 교장으로 1990년 9월 1일자로 내보내었습니다. 이 때의 업무와 관련된 이야기들은 학교장으로 학교교육과정 행정을 살펴 보았던 부분에 언급해 두었습니다.(이 원고에서는 생략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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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교장 근무도 겨우 1년 6개월 만에 마치고 다시 교육부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제6차 교육과정 개정 업무 추진 때문에 함수곤 국장님의 적극적인 권유와 조규향 차관님의 당부가 있어 제가 동의서에 싸인을 하여 이루어진 일이었습니다. 얼마 길지도 않은 잠깐 동안 교장 업무를 수행해 보았으나, 이것도 임기제가 적용되는 바람에 교장 1차 임기 4년을 다 끝낸 것으로 간주되어 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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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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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3월 1일 다시 교육부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주어진 자리는 장학편수실 교과지도장학관실의 교육연구관이었습니다. 처음 들어올 때, 인사 담당 부서에서는 곧 장학관으로 바꾸어 줄 테니 걱정 말고 들어오라고 했는데 그대로 교육연구관으로 발령을 내 버렸습니다. 교육부에서 교육연구관을 하다가 교장 발령을 받고 나갔다가 다시 들어오는 사람은 대부분 장학관으로 발령을 냈고, 교육연구관으로 다시 들어오는 예는 거의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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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지도장학관실에서는 연구학교 운영 지도 업무를 총괄하고 수업 개선을 위한 장학 자료를 발간, 보급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교육과정담당관실에서 교육과정을 편성하는 업무를 하였다면, 교과지도장학관실에서는 편수에서 만들어 놓은 교육과정을 정상적으로 운영하는 업무를 하였으므로 교육과정 구현을 위한 다양한 방안을 제시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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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편수에서는 ‘교육과정 편성 업무만 우리 일이다.’, 장학에서는 ‘교육과정 운영과 평가는 우리 일이다.’ 하여 업무가 조정되지 않고 있는 데, 제 생각으로는 지금이라도 교육과정의 편성・운영・평가에 관한 일들은 ‘네것, 내것’ 구분하지 말고 교육과정 쪽에서 일괄하여 맡아 처리하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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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서울 원효초등학교 교장으로 근무하는 동안 초・중・고등학교의 제6차 교육과정 개정 업무는 상당히 진척되고 있었습니다. 저는 초등학교 교육과정심의회 심의 위원으로 참여하고, 초등 통합 교과, 특별 활동 교육과정 개선에도 참여하여 의견을 제시하는 정도였습니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함수곤 교육과정담당관과 기회 있을 때마다 개선 의견을 나누어 보고 어떤 게 좋을까 하는 토론도 가져 보다가 교과지도장학관실에 다시 들어간 후 개정, 고시하기 이전까지 개정 시안을 나름대로 수정, 보완하고 의견을 제시해 주는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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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서울교대에서 제6차 교육과정에 관한 협의회가 있었는데, 함수곤 장학관도 참석하셔서 밤 11시까지 술을 나누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 일이 있습니다. 서로 헤어진 후 저는 화곡동 집으로 가느라 큰 가방을 들고 택시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아리랑치기에게 뒷머리를 얻어맞고 가방을 모두 빼앗겨 버렸습니다. 깨어나 보니 강남성모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었습니다. 참으로 애석한 것은, 그 가방 속에는 해방 이후 교육부 지정 연구학교 운영 자료가 들어 있었고, 저는 이 자료를 정리하여 목록을 만드느라고 들고 다녔던 것입니다. 맨 처음 문교부 지정 연구학교는 1951년 부산동광국민학교였던, 그런 역사적인 자료를 분실한 것이 너무나 안타까웠습니다. 물론 주머니 속의 지갑이나 저금통장, 은행 카드, 돈, 모두 잃어버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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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차 교육과정은 초등학교는 1992년 9월 30일에, 중학교는 6월 30일에, 고등학교는 10월 30일에 시차를 두고 개정, 고시되었습니다. 교육과정 개정 사상 처음으로 중앙 집권형 교육과정을 지방 분권형 교육과정 체제로 개선하여 국가, 시・도, 학교 수준의 교육과정 편성・운영 체제와 역할 분담을 강조한 교육과정이었습니다. 이를 통해서 학교 교육과정 편성・운영의 중요성을 강조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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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편수 쪽보다는 장학실 쪽을 선호하는 경향이었습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9월에 장학관 자리를 준다는 것도 마다하고 제가 가야 할 방은 교육과정담당관실이라는 생각에 변함이 없었습니다. 1994년 5월 다시 교육과정담당관실로 자리를 옮겼는데, 교육과정 개정 후속 지원 연구를 하고 교육과정 연수 자료 발간과 교원 연수를 하는 데 당신이 필요하므로 교육과정담당관실로 다시 와 달라고 김용만 장학관이 직접 당부를 하는 바람에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그 때에는 함수곤 장학관이 편수국장이었고, 김용만 장학관이 교육과정 담당관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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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돌아와 보니 교육연구사 시절에 애써서 정리, 정비해 놓은 아까운 교육과정 자료들이 업무 담당자의 책상 위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교육과정담당관실에서는 저와 정영권 교육연구관, 김영일・ 박정자 교육연구사가 함께 일하게 되었습니다. 일을 열심히 잘하는 조규석, 김만곤 교육연구사는 교육과정담당관실에 조금 있었으나 그들의 사회과 교육전공을 살려 사회과학편수관실로 가서 일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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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교육과정 개정 업무가 끝나면 후속 지원 업무를 추진하는 동안 약간 한숨을 돌리면서 다양한 활동을 하는 것이 상례였으나 교육개혁위원회와 세계화위원회의 요청에 의해 제6차 국민학교 교육과정을 부분 개정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 생겨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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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11월, 김영삼 대통령의 세계화 구상 이후 1995년 1월 4일 세계화추진위원회가 발족되어 영어를 국민학교의 정규 교과로 신설한다는 방침이 세워졌습니다. 당시에는 김숙희 장관 재임 시절(1993.12.22-1995.5.12)로, 편수국장에는 한명희 장학관이, 교육과정 담당관에는 유천근 장학관이 업무를 맡고 있었습니다. 그 해 2월까지 교육부의 의견을 제시해야 하기에 편수국에서는 1999년도 5, 6학년부터 점진적으로 영어 교육을 시행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제시하였으나, 김숙희 장관은 1, 2학년부터 당장 시행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기초 연구도 해야 하고, 영어 교육과정도 만들어야 하며, 교과서도 개발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고 설득하여 한국교육개발원(허경철 박사팀)에 ‘영어 교과 신설을 위한 국민학교 교육과정 개선 연구’를 3월부터 위탁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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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청회(5월)에서는 영어 교육에 따른 가치관의 혼란, 영어 과열 과외 현상 초래, 사교육비 증대 등의 문제가 제기되었으나, 세계화에 따른 영어 교육의 추세를 꺾을 수는 없었습니다. 요즘 들어 유치원에 들어가기도 전부터 영어 교육 열풍에 휩싸이고 있는 현실에서 그 때에 제기되었던 문제점들이 학교 현장에 그대로 노출되고 있는 것을 보면서 좀 더 신중하게 처리되었어야 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영어 교과 교육과정의 시안 개발은 김숙희 장관의 지시에 따라 서강대학교 이홍배 교수팀에게 위탁하였으나, 김 장관과 이 교수는 미국에서 공부할 때 같은 대학에 다닌 인연이었다는 사실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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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초 연구와 시안 개발을 바탕으로 급속하게 교육과정심의회를 구성, 운영하고 협의를 거쳐 1995년 11월 1일 교육부 고시 제 1995-7호로 국민학교 교육과정을 부분 개정하였습니다. 이로 인하여 제6차에서 신설된 학교 재량 시간이 시행도 해 보기 전에 0~34시간이라는 이상한 모양의 시간이 배당되어 교육 현장에서는 ‘0의 의미가 과연 무엇인가’라는 강한 질의가 속출하기도 하였습니다. 영어 교과는 3학년부터 주당 2시간 이상 시간 배당을 하고, 음성 언어 위주의 교육을 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교과서는 검정으로 개발, 보급하며 1997년 3학년부터 연차적으로 시행하도록 조치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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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교과 신설에 따른 교육과정의 개정으로 교육개혁위원회에서는 제6차 교육과정에 대한 재검토를 하여 1995년 말에는 교육과정 개정의 기본 골격이 제시되고, 1996년 2월 9일에는 교육 개혁 과제의 일환으로 ‘초・중등학교 교육과정 개혁’ 방안이 제시되어 ① ‘국민 공통 기본 교육과정 체제 설정’ 등 신 교육과정 편제 도입, ② 수준별 교육과정 도입, ③ 필수 과목 축소와 선택 과목 확대, ④ 정보화・세계화 교육 강화 등과 같은 개정 지침이 세부적으로 제시되기에 이르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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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개혁위원회 내의 ‘교육과정특별위원회’에는 김호권 교수를 위원장으로 하여 강충열, 황규호, 김남두, 김영식 등이 공동 연구자이고, 정영권, 허경철, 이명현 등이 연구 협력자로 참여하여 이른바 ‘신 교육과정’을 개발하여 이를 그대로 시행할 것을 교육부에 요구하게 되었습니다. 교육개혁위원회의 이돈희 교수, 이명현 교수 등은 그 이후 교육부 장관이 되어 ‘신 교육과정’의 추진을 확인하였으며, 당시의 담당자들도 이들과 함께 다른 나라의 교육과정 자료 수집차 해외 여행까지 다녀왔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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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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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하여 제6차 교육과정이 제대로 시행도 되기 이전에 거센 파도가 밀어 닥쳐왔습니다. 당시의 교육과정담당관실에서는 과연 어떻게 하면 제6차 교육과정의 기본 틀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신 교육과정’을 받아들이느냐를 논의한 끝에 1996년 3월 19일 ‘초・중등학교 교육과정 개정 기본 계획’을 수립하고, 안병영 장관(1995.12.21-1997.8.5)의 결재를 받아 기초 연구를 위탁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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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의 편수국에서는 이 기초 연구를 통하여 제6차 교육과정의 내용을 될 수 있으면 유지해 나가는 방안은 이 방법밖에 없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심광한 교장 선생님이 편수국장이었고, 유천근 장학관이 교육과정담당관으로, 유학영 장학관이 인문과학편수관, 김성한 장학관이 사회과학편수관, 황홍순 장학관이 자연과학편수관으로 재직하고 있었습니다. 이 때의 정황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나 교육단체에서는 간혹 ‘제7차 교육과정은 기초 연구도 하지 않았다.’고 비난하는 일도 있었습니다만,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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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4월 2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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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개정 기초 연구 및 총론 시안 개발은 이돈희 원장님을 위원장으로 하여 한국교육개발원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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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특수학교 교육과정 개정은 김정권 교수를 위원장으로 하여 대구대학교에 위탁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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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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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현행 교육과정 분석 평가 연구(김재복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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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교육과정 국제 비교 연구(윤병희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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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교육과정 개정 요구 조사(김기석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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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 통합 교과의 체제・구조 개선 연구(김종건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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⑤ 초・중등학교 교육과정 체제・구조 개선 연구(곽병선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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⑥ 실업계 고등학교 교육과정 개선(장석민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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⑦ 기타계 고등학교 교육과정 개선(성일재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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⑧ 수준별 교육과정 개발(허경철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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⑨ 특수학교 개정 기초 연구(김병하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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⑩ 특수학교 총론 시안 개발(김정권 교수) 등을 위탁하여 7개월의 연구 기간을 거쳐 10월까지 연구 결과 답신 보고서가 나오게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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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초 연구와 총론 시안 개발에는 교육과정담당관실에서 제가 교육과정 개정 업무 추진의주무가 되고, 박정자・김영일・양순열 교육연구사가 교육과정 개정의 모든 과정에 참여하도록 조치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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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제7차 교육과정 개정 업무가 추진되던 중에 직제가 개정되고 편수국이 해체되는 엄청난 일이 생겨났습니다.
1996년 6월, 편수국이 해체되기 이전에 당시의 심광한 편수국장은 교육부 16층 상황실에서 편수국의 교육 전문직을 모아 놓고,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 해도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자.”는 말로 편수관들의 아쉬운 마음을 달래기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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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제 개정에 따라 유천근 장학관이 교육과정심의관으로, 이범주 장학관이 교육과정담당관으로 부임하였는데, 교육과정담당관실과 교육평가담당관실로 분리되면서 편수 인력이 28명으로 대폭 감소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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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2월 28일에는 우선적으로 ‘교육과정 총론의 편제와 시간 배당 기준 개선(안)’을 장관(안병영)의 결재를 받고 미리 확정, 발표하였으며, 이 총론의 개정에는 연인원 4,598명이 전국에서 폭넓게 참여하였고, 총 80회의 협의회, 검토 및 심의 과정을 거쳐 국민적인 합의를 도출하고자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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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4월 3일에는 장학관 4명을 두어 교육과정담당관실을 팀제로 운영하게 하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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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과정 기획(이경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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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사회(신영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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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실업(이동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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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평가(양우섭)의 네 파트로 나누어 맡은 분야의 일을 새로 보임된 장학관이 맡도록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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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8월 27일에는 새로 취임한 이명현 장관(1997.8.6-1998.3.2)이 현재 추진 중인 제7차 교육과정 개정 상황을 보고하라는 지시가 있었는데, 장관실에 가 보니 강충렬, 황규호, 김남두, 김영식, 허경철 등과 개정 업무를 협의하여 재구성, 조정하라는 것이었습니다. 학교 현장의 실정에 맞추어 수준별 교육과정과 선택중심 교육과정의 운영을 조정하였다는 설명을 들은 이명현 장관은 실장, 심의관, 담당관뿐만 아니라, 장학관인 저까지 불러 놓고 웃통을 벗으면서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쌍소리까지 마구 퍼부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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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여곡절 끝에 1997년 12월 30일 교육부 고시 제 1997-15호로 ‘초・중등학교 교육과정’이 개정되었는데, 이것이 제7차 교육과정이었습니다.
제7차 교육과정 개정에는 학교 현장 및 각계의 다양한 요구와 의견을 폭넓게 반영하여 국민적인 합의를 도출하고자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1996년부터 1997년까지 지난 2년 동안 교육과정 전문가, 대학 교수, 현장 교원, 학부모 등 연인원 14,332명이 교육과정 개정에 참여하였고, 총론과 각론 개발 협의회, 세미나, 공청회 등 연 282회의 각종 협의회를 개최하여 교육 현장의 폭넓은 의견과 요구를 수용하였으며, 교육과정 운영 위원회, 학교급별 및 교과별 소위원회 등 127개의 교육과정 심의회에 1794 명의 심의 위원이 참여하여 ‘자율과 창의에 바탕을 둔 학생 중심 교육과정’을 구성하고자 수많은 열과 성의를 다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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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2월 정권이 바뀌고 이해찬 장관(1998.3.3-1999.5.24)이 교육부로 부임해 왔으나, 그는 기회마다 과거에 책방을 경영한 일이 있음을 강조하면서 교사와 교과서에 관한 부정적 견해를 나타내는 일이 많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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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1999년 3월 1일자로 교육과정평가정책과 과장(장학관)으로 보직을 받고 근무하게 되었는데, 또다시 직제 개편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고, 교육과정 방이 아예 없어질 것이라는 소문도 무성하였습니다. 그 가운데에서 1999년 4월 14일 장관실에서 교육과정, 교과서와 관련되는 정책 토론이 있으니 자료를 준비하라는 지시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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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한 달을 열심히 자료를 만들었는데 하나의 두툼한 책이 되었습니다. 이를 만들기 위해 밤을 새운 일도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직제 개편을 앞두고 장관님과 실・국장 앞에서 교육과정이 무엇인지, 교과서가 왜 있어야 하는지, 편수의 중요성이 어떠한지를 설명하거나, 아니면 그들을 교육시키는 계기로 삼겠다고 작심을 하고 4월 14일 오후 2시 30분부터 6시 30분까지 4시간 동안 교육과정과 교과서에 관한 정책 토론에 들어갔습니다. 제가 먼저 설명할 2시간 동안은 제가 장관님께 교육과정에 대해 말씀드릴 수 있는 참으로 좋은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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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과정과 교과서의 의미는 무엇인가, 교육과정의 세 가지 수준과 위상은 어떠한가, 교육과정에 관한 역할 분담은 어떠해야 하는가, 새로운 교과서관은 과거와 비교하여 어떻게 변화되고 있는가, 학교 교육과정은 왜 중요한가, 그리고 교육과정 업무는 교육부의 본질적이고도 가장 핵심적인 기능임을 정성을 다해 진솔하게 보고 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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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교육과정은 일정한 주기에 따라 전반적으로 개정해야 하는 것은 아니며, 국민적인 합의에 의해 만들어진 교육과정을 적용도 해 보지 않고 또다시 개정하는 일을 반복하는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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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앞으로는 교육과정을 개선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경우, 개선이 필요한 부분만을 수시 개정하는 탄력적인 운영이 필요하며, 교육과정 심의회를 상설 기구로 설치할 필요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지금은 교육과정 자체보다는 그 교육과정을 정상적으로 바르게 운영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후속적인 체제, 교과서 개발, 교원 연수・양성・수급, 교육 시설 개선 등과 같은 후속적인 지원 체제가 강화되어야 함을 강조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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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생각해도 이해찬 장관은 제 이야기를 아무 말 없이 경청했다고 생각합니다. 그 다음 2시간 동안은 교과서 편찬, 교과서 발행 제도 개선 방안 등과 관련되는 질문을 실・국장이 나누어 했고, 저는 그 대답을 조리 있게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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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자리에서 이해찬 장관은 교육과정정책과와 교과서발행과로 조금이나마 남아 있던 편수 조직을 그대로 존속하게 하였으며, 교육과정정책과는 제가 설명드린 대로 6개의 팀제(교육과정, 교과서, 인문과학, 사회과학, 자연과학, 실업교육)로 운영되게 직접 지시를 하여 팀장으로 장학관을 보임하도록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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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에 커다란 문제가 생겼습니다.(사실 문제랄 것도 없었으나 그당시는 문제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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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관님 지시로 교육과정평가정책과가 장학편수실의 주무과가 되도록 하고, 저를 주무과장으로 하여 회의에 참석하게 하였는데, 이에 따른 난리는 정말 가관이었다고 하겠습니다. 당장 이 때까지 주무과였던 학교정책과가 주무과가 안 되고 교육과정(편수)이 주무과가 된다면 학교정책실장을 18층에서 어떻게 보좌하느냐는 논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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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의 K 실장이나 L 심의관은 행정 위주이므로 실장님이 장관님께 안 된다고 말씀드렸더니 장관님이 일언지하에 그렇게 하라고 지시하여, 이해찬 장관이 5월에 물러났으나 8월 말까지 그대로 교육과정이 주무과가 되어 제가 회의도 참석하고 국회도 참석하려니 이것도 참으로 고역이었습니다. 늦게나마 이해찬 장관이 교육과정과 교과서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고마운 일이었으나, 사실 그 때의 심정으로는 이해찬 장관이 그대로 있었으면 혹시 편수국이 되살아나지는 않았을까 하는 기대감마저 있었습니다.(나중에 L 심의관한테서 들은 이야기이지만, 장관은 교육과정의 중요성을 너무 늦게 알게 되었다면서 교육과정을 주무과로 하라고 지시하였다고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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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임으로 김덕중 장관(1999.5.25-2000.1.13)이 오셨는데, 1999년 9월~10월의 국정 감사 기간은 온통 제7차 교육과정에 관한 질문이었습니다. 국회 의원들이 교육과정에 대해 공부하고 질문하는 것은 교육과정 개정 사상 거의 전무후무한 일이어서 어떻게 보면 좋은 현상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러나 교원 연수 문제도, 교원 수급 양성 문제도, 교육 시설・환경 개선 문제도 모두 제7차 교육과정과 관련하여 질문을 쏟아붓는 바람에 제가 장관님께 “이것은 제 일이 아니라서 잘 모르겠습니다.”라고 대답할 수는 없으니, 어떻게든 제7차 교육과정만 나왔다 하면 저를 쳐다보는 장관님 앞에서 자료를 모아 드리지 않을 수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국정 감사가 끝나고 다른 과장들이 모두 저를 보고 수고했다고 하면서 우리는 교육과정정책과 때문에 편하게 지냈다고 이야기하거나 인사를 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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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중 장관은 국가 수준의 교육과정에 대해 잘 모르시기 때문에 늘 예상 질의에 대한 답변 자료를 작성해 드렸고, 이를 작성하느라 고생한 기억이 많습니다. 매일 저녁 11시 이후에 집에 들어가고, 새벽 6시에는 직장으로 나오는 일이 계속되었으며, 꽃이 피었는지 세상이 어떻게 바뀌었는지도 모르는, 어쩌면 바보같이 오로지 일에만 매달리는 정신 없는 세월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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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가운데에서도 초・중・고등학교의 교과용 도서 개편 업무는 지속적으로 추진되었고, 제7차 교육과정에 대한 해설서를 초・중・고등학교의 학교급별, 교과별로 만들어 일선 교육 현장에 배포하고, 교육과정에 대한 교원 연수도 학교급별, 교과별로 진행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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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6월 4일에는 교육과정정책과로 명칭이 또 바뀌고, 과장으로서의 소임을 다하고자 열심히 노력하였습니다. 1998년부터 외환 위기의 직접적인 영향으로 앞으로 적용해야 할 제7차 교육과정에 대한 계속적인 거부가 지속적으로 전개되었습니다. 교원 연수 자료도 발간, 보급하고, 교육과정 해설서도 만들고, 학부모・학생・교원에 대한 이해 자료도 제시하였으나 교원 노조에서의 문제 제기가 많았습니다. 그들을 설득하기 위한 각종 자료를 만들어 배포하기도 하였으나 제7차 교육과정에 대한 오도되고 부정적인 이미지는 너무나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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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교육과정정책과의 장학관과 담당 과장으로 근무하면서 1998년부터 2002년 3월 학교로 다시 나오기까지 교육과정 자료 163책과 홍보 자료 12책을 발간하여 일선 교육 현장에 보급하기도 하였습니다. 제가 주관하여 발간, 배부한 제7차 교육과정 자료 목록은 이 책의 제4부에 제시해 두었습니다만, 당시에 함께 근무하였던 류연수, 김만곤 장학관, 김동원 교육연구관과 권영민 박사, 류위준 박사, 그리고 이우용, 이화성, 김대원 선생님 등의 노고가 매우 컸습니다. 아마 그분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일을 처리하지 못했을 정도로 참으로 고마운 잊을 수 없는 동료들 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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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2000년도에는 우리 나라의 교육과정 자료, 교과용 도서 자료, 교육과정 기초 연구 자료, 각종 지도 자료 443,571쪽 분량의 내용을 데이터베이스화하여 교육과정 자료를 원하는 사람 누구에게나 교육과정 정보 서비스를 제공하고자 교육과정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였습니다. 교육과정 웹 사이트의 별도 도메인을 설정(URL:www.kncis.or.kr)하였는데, 지금은 어떻게 운영되는지 궁금하기만 합니다. 이를 위해 김송미 선생님과 김동원 교육연구관이 참으로 애를 많이 썼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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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1월 김대중 대통령은 뉴밀레니엄 신년사에서 “세계에서 컴퓨터를 제일 잘 하는 나라로 만들겠다.”고 하면서 전 학교에 컴퓨터 실습실 구축, 전 학교의 인터넷 연결, 전 학교의 인터넷 사용료 5년간 무료, 1교사 1PC 보급 등을 2000년 이내에 완료할 것을 공약하였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정보 교육 여건 개선도 중요하지만, 정보 통신 기술을 교육에 도입하려면 체계적으로 정리된 교육과정이 있어야 하고, 교사용 지도서와 교과서가 학교에 보급되어야 하는데 그럴 만한 시간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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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사람들은 행정 명령으로라도 당장 시・도 교육청에 공문을 보내 시행하라고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는데, 이것이 정말 문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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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통신 기술(ICT) 교육의 중요성을 몰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기초 연구도 하고, 교육과정도 만들어야 하고, 초・중등학교 시간 배당 기준도 바꾸어야 하는 어려움에 처했습니다.
사실은, 이러한 것을 예견하고 1999년부터 한국교육학술정보원의 손병길 박사팀에 부탁하여 ‘제7차 교육과정 대비 초・중등 정보 교육 개선 방안 연구’를 의뢰해 놓은 상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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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육학술정보원의 손병길, 김영애, 김용 등의 연구진과 교육과정정책과 김동원 연구관, 박종은 연구사가 힘을 합쳐 2000년 8월 1일 ‘초・중등학교 정보 통신 기술 교육 운영 지침’을 만들어 각급 학교에 배포하고, 이에 따른 해설서를 간행하여 12월에 나누어 주었습니다. 이를 토대로 교과서와 지도서를 연차적으로 만들어 준 일이 있는데, 교육과정도 없는데 당장 시행하라고 억지를 쓰는 사람이 많을 때는 참으로 어려웠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재량 활동 1시간이 ICT 교육에 쓰이게 됨에 따라 원래의 재량 활동을 설정한 교육적인 의미가 그만 퇴색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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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1월에는 문용린 교수가 장관(2000.1.14-2000.8.7)으로 오셔서 참으로 반가웠습니다. 서울대학교에서 간혹 뵌 일이 있고, 일이 있으면 교육과정담당관실에도 자주 들르던 분이셨습니다. 한 가지 특기할 만한 일은, 문용린 장관은 교육 전문직 인사가 있을 때마다 총무과장에게 지시하여 학교정책과장(송영섭 교장)이나 교육과정정책과장에게 의논하도록 조치하였기 때문에, 담당 과장에게 인사권은 없으나 각 시・도에서 추천된 사람 중에서 누구를 쓸 것인가를 결정할 때에 두 사람의 전문직 과장을 반드시 참여하게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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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개월 동안 서울영신초등학교 교감으로 나가 있던 김만곤 선생을 다시 교육부로 모셔 오고자 할 때, 교육부 총무과에서는 누구를 장학관으로 하면 좋겠느냐고 의논을 해 왔습니다. 교육연구관을 거치지 않은 사람을 장학관으로 하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나 전직은 가능하기 때문에 저는 그 자리에서 김만곤 교감을 장학관으로 교육과정담당관실에 보내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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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 L 심의관은 다른 교육연구관들을 장학관으로 쓰려고 했는데 느닷없이 김만곤 선생이 장학관으로 발령받으니 저에게 너무나 심한 이야기와 꾸지람을 한 일이 있었습니다. (인사권이 담당 과장에게 있는 것도 아닌데, 장학관으로 함께 일할 적격자를 단순히 과장이 추천하였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가 되었습니다.) 이 일은 기회 있을 때마다 L 심의관이 과장인 저에게 꾸지람하고 계속적인 스트레스를 주었던 일로 당시 발령을 받은 당사자에게는 이야기하지 않아 아마 지금도 그 과정을 모르는 것으로 짐작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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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인사발령이 있은 후, 박제윤 교장도 수준별 교육과정으로 심의관 방에 갈 때마다 참으로 많은 스트레스를 받았습니다. 결국 이 일은 장학관으로 발령받은 그 사람의 능력은 생각지도 않고 아이들 마냥 말도 안 되는 트집과 이야기로 과장을 괴롭혔던 단골 메뉴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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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간 문용린 장관이 더 계셨으면 참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은 남아 있었습니다. 교육전문직 인사를 위해 총무과에 교육전문직 한 사람을 배치하기로(김동원 교육연구관) 결정된 상태였는데 장관님이 바뀌어 보류되고, 교육전문직의 장기 해외 연수도 흐지부지된 일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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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에는 교육전문직 과장의 숫자가 너무나 적은데 국회에서 질의를 하는 일도 많아서 그런지 학교정책과장과 교육과정정책과장은 3급(부이사관) 상당의 국장급 대우를 해 주었습니다. 저는 2002년 2월 교육부를 떠나올 때까지 국장급 대우를 받는 과장이어서 재산 등록도 해마다 하곤 하였습니다. 편수국의 축소로 업무를 팀제로 운영하게 되어 5명의 장학관과 1명의 서기관(성삼제)이 저를 보좌하는 형태였습니다. 하여간 제가 서울 목동초등학교로 나가는 일이 결정되었을 때, 이상갑 실장 등은 서울시교육청에서는 교육부에서 부이사관급 대우를 받는 교육과정정책과장을 너무 소홀히 대접하는 것이 아니냐고 역정을 낸 일도 있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주기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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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8월 31일에 송자 장관 후임으로 이돈희 교수님이 장관(2000.8.31-2001.1.29)으로 오셨습니다. 이돈희 장관님은 교육과정담당관실에 근무하셨던 임대영 교장 선생님과 막역한 친구 사이이기 때문에 교육과정담당관실에도 자주 오셨고, 한국교육개발원 원장으로 재직하실 때에는 제7차 교육과정 개정 연구를 직접 진두 지휘한 관계로, 또 교육개혁위원회의 업무로 너무나 제7차 교육과정을 잘 알고 있었고 저도 가끔 만나기도 한 사이여서 참으로 반가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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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임하신 다음 날인가 부내 순시를 하면서 저희 방으로 들어오셨는데 여러 사람 앞에서 “어이, 이경환 선생 자리가 어디야?” 하면서 정말 다정하게 말씀하시는 것이 무척 고마웠습니다. 언젠가는 과장이 참석하는 간부 회의를 하는 자리에서 “저기 앉아 있는 이경환 선생이 제7차 교육과정을 만들 때 나를 괴롭힌 사람이야.” 라고 말하여 모든 사람들이 함께 웃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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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11월 서울강서 지구의 지역 사회 학교 교장 선생님들이 민족사관고등학교를 방문한 일이 있었는데, 이돈희 교장 선생님이 강단에 서시더니 저를 보면서 “이경환 선생, 오늘 여기에는 어떤 분들이 오셨지?” 하고 말씀하시면서 여러 선생님들 앞에서 저를 소개해 주시기도 하여 정말 고마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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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돈희 장관님은 부임하셔서 전체 교육부 직원 앞에서 ‘제7차 교육과정의 성공적 정착’을 강조하였습니다. 제7차 교육과정의 구체적인 실천을 학교 현장에 확산하고 이를 정착시키기 위해서 ‘제7차 교육과정지원장학협의단’을 구성, 운영하되, 중앙 지원단(569명), 시・도 지원단(4472명), 지역 지원단(3960명)으로 구분하여 학교급별 교육과정 적용 시기를 감안하여 단계적으로 추진하도록 하였습니다. 이 장학협의단에서는 다음과 같은 일을 주요 사업으로 추진하도록 하였는데, ① 워크숍을 통한 중앙・지방 요원 자체 연찬 강화, ② 교원 연수 프로그램 및 연수 교재 개발・보급 확대, ③ 교육과정 연수 프로그램 참여 및 장학 활동 전개, ④ 대국민 교육과정 홍보 강화 등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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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관련하여 제7차 교육과정 관련 업무를 효율적으로 추진하기 위하여 ‘교육과정지원센터’를 만들어 운영하였는데, 이 업무 처리는 김만곤 장학관을 팀장으로 하고 방도 별도로 마련해 보았으나 얼마 후 그 방도 다시 다른 부서에 빼앗기는 일이 생기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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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제7차 교육과정 시행 준비단을 2000년에 구성하였는데, 교육부 차관을 단장으로 하고, 교육과정정책과장이 실무 간사가 되어 다른 실・국의 업무 자료를 수합, 정리하고, 추진 상황을 월 1회 보고하도록 하였습니다. 여기에서는 교육과정 편성・운영과 홍보, 교원 양성・수급, 지방 교육 행・재정 지원, 교육 환경 개선, 교육 정보화 지원 등과 관련되는 사항을 총괄하고, 2000년 2월부터 연 3회 종합 보고회를 개최하여 각 시・도의 추진 현황을 해당 시・도 부교육감이 발표하도록 하여 교육 환경 개선 사업이 상당한 수준으로 추진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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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1월 교육부가 교육인적자원부로 바뀌어 부총리 부서로 승격함에 따라 한완상 부총리 겸 교육인적자원부 장관(2001.1.29-2002.1.29)이 2001년 1월 29일 부임해 오게 되었습니다. 한완상 부총리에게는 2월에 별도로 제7차 교육과정 관련 업무의 주요 쟁점 사항과 이에 대한 우리 부의 견해와 대책을 보고 드리며, 교육과정 적용을 위해서는 효율적인 지원을 확대해 나가야 함을 말씀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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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부총리에게 제7차 교육과정 자료를 보고 드린 후, 4월에는 과로와 스트레스가 겹치고 가슴이 답답하여 가까운 강북삼성병원에 갔더니 급성심근경색이라고 하며, 그 자리에서 바로 중환자실로 입원하여 2주 정도 병실에 있었던 일이 있습니다. 그 당시 신속하게 저를 병원으로 데리고 갔던 성삼제 서기관과 이우룡 선생님에 대한 고마움은 지금도 잊을 수 없으며 아마 영원히 기억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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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완상 장관도 문병을 와서 교육과정정책과장에게 너무나 많은 일을 시켜서 미안하다는 말씀을 하시기도 했습니다. 한완상 장관은 자그마한 키에 참으로 점잖은 분이었습니다. 제가 병실에 있는 동안 함수곤 교수님을 비롯하여 수많은 ‘편수 가족’이 염려해 주시고, 물질적인 지원까지 해 주셨는데, 저는 받기만 하고 아직까지 베풀지 못해 늘 죄송한 마음 금할 길이 없었습니다. 그 당시부터 이 다음에 퇴직하면 ‘교육과정・교과서 연구회’ 회원들을 위해 무엇인가 봉사 활동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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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원 후에는 ‘이제 학교로 나가야 하겠구나.’ 하고 다짐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편수국에서 정년 퇴임을 하고 싶었으나, 직제 조정이 있을 때마다 보면 편수국을 축소, 조정하고 인원을 줄이는 것이 통상적인 일이었습니다. 제7차 교육과정과 관련지어 간행된 책은 200여 가지가 넘었습니다. 나중에 학교에 나와 교육과정 연수를 어떻게 했는지 알아보았더니, 하지도 않고 슬쩍 넘어간 것이 대부분이었고, 그 많은 자료를 일선 학교에 배부했으나 과연 몇 명이나 교육과정 연수 자료를 읽어 보았는지 알 길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사실 선생님들도 제7차 교육과정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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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저도 건강을 위해 서울시교육청으로 전출 신청을 냈습니다. 2002년 1월 29일 청와대에 근무하던 이상주 총장이 부총리 겸 장관으로 부임했는데, 한 달 후 장관님 앞에서 발령장을 받게 되었습니다. 서울 양천구에 있는 목동초등학교 교장으로 발령을 받았습니다. 제가 과장이어서 맨 먼저 받고, 장관님 말씀을 듣기 위해 장관실에 줄을 서 있는데 이상주 부총리께서 “다른 분들은 모두 커다란 발령장을 받는데 이경환 과장의 발령장은 왜 그렇게 작은가?” 하고 질문을 했더니, 배석한 다른 실・국장들이 “교장 중임을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고 오히려 저보다 먼저 답변을 대신 해 주는 광경도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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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동 지역에서는 제일 좋은 학교로 가는군요.”라는 말씀에 “교육 여건이 어려운 학교이지만 제가 가서 좋은 학교로 만들어 보겠습니다.”라고 했더니‘ 그 자리에서 이 과장이 부임하는 목동학교에 학교 도서관을 만들 수 있게 지원해 주도록 지시하고, 20년 가까이 교육부에서 고생하였다는 격려의 말씀도 해 주었습니다. 그 해 10월, 8억 5천만 원을 지원 받아 정보 도서관을 짓기 위한 기초 공사를 실시하였는데, 3년 동안 거의 24억 원의 예산을 들여 정보 도서관, 멀티미디어실, 컴퓨터실, 특별 교실, 다목적실, 강당 겸 체육관이 마련된 종합 정보 학습관을 지을 수 있게 도와 주신 점을 무척 고맙게 생각하며 감사드립니다.
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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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코 짧지 않은 세월이었습니다. 편수의 뒤안길 이라는 것이 개인적인 신변잡기에 불과한 것이니 혹시 위에 제시한 글에 대하여 마음에 들지 않은 내용이 있었다면 넓은 이해있으시기 바랄 뿐입니다. 42년의 교직 생활 중 18년 동안 교육부에서 교육과정 업무를 담당할 때에는 우리의 현장 선생님들께 도움을 줄 수 있는 자료를 만들어 드린다는 생각에 정성과 열의를 다 기울여 가며 일했으며, 거기서 긍지와 보람을 느끼며 항상 웃는 모습으로 즐겁게 생활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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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교육과정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교육과정 해설서를 집필할 때에는 원고지에 연필로 하나하나 정성들여 써 나갔습니다.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및 특수학교의 총론도 직접 원고지에 쓴 글이었으며. 특별 활동과 재량 활동에 관한 해설도 직접 집필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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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저의 교직 생활을 뒤돌아보면, 어려움과 불안의 연속이 아니라 제가 스스로 선택하여 긍지와 보람을 느끼며 열성적으로 일한, 제가 좋아서 교육과정과 교과서를 사랑했던 즐거운 생활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1982년 문교부 교육연구사로 출발하여 교육연구관, 장학관, 교육과정정책과장을 역임하며 교육과정과 교과서를 사랑하는 일들을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은 결코 혼자서 한 것은 아니었으며 그 동안 수많은 선배, 동료, 그리고 후배들의 지원과 격려 때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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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서의 명칭은 문교부에서 교육부, 교육인적자원부, 교육과학기술부 등으로 변화되었으나, 이 부서에서 수행하는 교육행정, 교육법규, 교육재정․예산․투자, 교원양성․연수․수급, 인력개발, 입시제도, 교육시설․설비 등과 같은 일들은 학교에서 학생들의 공부를 더 잘 가르치기 위한 교육의 지원관리 기능입니다. 이러한 교육 기능들에 대한 교육 정책을 수립하고, 집행하는 근거가 되는 것이 바로 “국가 수준의 교육과정” 기준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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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운 일본의 문부성에는 교육과정과 교과서 정책을 수립하고 집행하는 조직과 기구가 과연 어떠한지 살펴보십시오. 우리와는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이제 공교육을 되살리고, 국가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서, 그리고 한 나라의 국민으로서 갖추어야할 기본적인 자질과 국민성을 제대로 기르기 위해서는 “교육과정 행정”을 바로 세워야 하는 것이 교육과학기술부가 해야 할 본질적인 기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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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에 대하여 책임을 지고 공적인 국가 교육과정 정책을 정상적으로 수행하는 일이 교육과학기술부의 기본적인 업무이기 때문에 이를 민간단체의 기초연구기능과 혼동하거나 이용하는 잘못을 더 이상 반복해서는 아니 되겠습니다. 민간의 연구기관은 국가의 교육과정 행정을 직접 수행하는 기구가 아닙니다. 단지 국가의 교육과정 정책 결정을 도와주는 기초적인 연구 기능을 담당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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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과학기술부의 업무 중에서 ‘교육과정 행정’이 핵심적인 일이라면 하루빨리 편수 기능이 회복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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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 ~ 2002
교육과정 담당 교육연구관, 장학관, 교육과정정책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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